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신철 - 한국영화계의 선봉

 


 

영화평론가 이정하는 “한국영화를 산업 차원에서 인식한 첫 번째 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충무로의 제작자들은 그를 혁명가 혹은 흥행사라고 불렀다. 1988년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차린 후 10여 년 동안 그는 항상 한국영화계의 ‘최초’였다. “왜 자본을 다른 곳(영화계 외부)에서 끌고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기존의 자본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왜 새로운 기획을 했냐고 한다면, 기존의 것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한 거고요. 계속 내몰려서 했던 것 같아요.”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과, 그것에 따른 뒷받침하는 창조적 추진력. 그의 행보는 현재도 한국영화의 화두다.

그의 부친은 만화가(지금은 고인이 된 신현성 선생)였다. 자연스레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영화도 그의 큰 관심사였다. 둘 사이에서 영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75). 대학교 1학년 때 연극반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문화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서영화연구회’의 일원이 되었고, 2학년 땐 이미 충무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때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고된 연출부 생활을 하던 그는 장길수 감독의 데뷔작 <밤의 열기 속으로>(85)에서 기획과 홍보 일을 맡는다. “의외로 재미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영화엔 시스템이라는 게 없었고, 감독이 기획부터 홍보까지 너무 많은 짐을 져야 했어요. 소재 선택에 있어서도, 관객과 만나는 지점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땐 극장에서 마케팅을 했는데, ‘왜 저렇게밖에 못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는 뭔가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극장에서 영화 마케팅을 하던 시절, 피카디리 극장과 명보극장의 선전실을 거치며 경력을 쌓은 그는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만든다. “자본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제작 노하우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죠. 그래서 영화의 핵심이 되는 컨셉트와 아이디어를 확실하게 제공하는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만든 거예요.” 한국영화 점유율이 10퍼센트대였고, 할리우드의 직배가 시작되었으며, 자본을 축적한 영화업자들은 빠져나가던 1980년대 말. 한국영화는 고사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영화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영화계에서 저의 첫 미션은, 한국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고.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영화를 찾아서 흥행을 거두면, 한국영화계가 망하지 않고 내가 일할 터전도 없어지지 않을 거니까요.”



신씨네를 만들고 신철 대표가 처음으로 기획을 맡은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9)였다. 그는 제일 먼저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을 만나 취재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한 편 개봉하려면 시나리오와 프린트를 모두 검열 받아야 했죠.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못하게 되니까 탁상공론이나 이상한 이야기로 빠지곤 했고요.” 한국영화가 현실적인 삶과 괴리되었던 시절, 신철 대표는 정치적 이슈를 피하면서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발로 뛰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삶엔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또 심각한 얘기가 많이 숨어 있었어요.”


지금은 너무나 보편적인 방식일지 몰라도, 당시엔 그런 기획 과정을 거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영화는 서울 개봉관에서 5만 명만 넘겨도 흥행작 소리를 듣던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16만8천 명을 동원한다. 새로운 방법론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90)로 여성 인권 문제에, <베를린 리포트>(91)로 분단 문제에 접근하며 ‘기획자’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신철 대표는, 어쩌면 <쉬리>(99)와 함께 1990년대에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일지도 모르는 <결혼 이야기>(92)로 충무로에 대변혁을 몰고 온다. 이 영화 또한 수많은 신혼부부 커플을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이 깃든 영화였다.

대기업 자본 유입, PPL 도입 등 산업적 측면 외에도 <결혼 이야기>는 한국영화에 ‘장르 트렌드’를 몰고 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만날 법했던 ‘로맨틱 코미디’는 한국적 상황으로 각색되어 서울 개봉관에서만 52만 명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봇물 터지듯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영화가 쏟아진다. 하지만 ‘트렌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저보고 트렌드를 잘 읽는다고들 그러시는데, 사실 트렌드라는 건 5,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 관객이 이런 영화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관객과 나를 분리시키는 순간, (관객의 요구에) 맞출 수가 없어요. 저는 제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 보고 싶은 영화를 기획할 때 흥행할 수 있었던 거고요.”



이후 그는 직접 제작에 뛰어든다. 제작자로서의 첫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미스터 맘마>(92). 서울에서 27만 명이었으니 큰 흥행이었고, 11만 명의 <101번째 프로포즈>(93)도 괜찮은 성적이었다. 세 편 연속 로맨틱 코미디로 성공을 거둔 신철 대표. 하지만 차기작은 <구미호>(94)였다. 장르적으로는 호러와 멜로의 결합이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을 도입한 작품이었다. “일상 생활을 소재로 선택해야 한다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바로 옆 극장의, 엄청난 특수효과를 사용한 할리우드 영화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선 소재 확장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선 특수효과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선택해야 했다. <스타워즈>(77)나 <블레이드 러너>(82)가 사용했던 아날로그 효과와, 당시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던 디지털 효과. 얼리 어댑터였던 그는 당시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래픽 효과를 경험했고 조만간 한국영화도 디지털 중심으로 바뀔 거라고 확신했다. ‘신씨네 컴퓨터그래픽스 아카데미’를 설립한 그는 고가의 장비를 들여와 작업에 착수했다.

본격적으로 CG를 도입한 <구미호>, 진일보한 CG를 선보인 <은행나무 침대>

“들여온 기계를 생전 처음 써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미호>를 만들었죠. 개봉 1주 전에 기술 시사회를 했는데…, 심장마비가 이렇게 오는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채 20분을 못 보고 몰래 도망치듯 극장을 나왔어요. 컴퓨터그래픽에 대해 그렇게 기대를 많이 하게 해놨는데, 엄청나게 욕 먹겠구나 싶었던 거죠.” 하지만 2년 후에 내놓은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96)는 확실히 달랐다. 18세 관람가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만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컴퓨터그래픽도 진일보했다.  “<구미호>의 실수를 거울 삼아서 솔루션을 많이 얻었어요. <구미호> 때 말단이었던 친구가 실장이 되어 전체적인 프로젝트를 관리했고요.” 영화라는 매체는 기술의 산물이라는 것, 기술적 진보에 따라 새로운 영화가 나온다는 것. 당시의 이 간단한 깨달음은 이후 ‘이소룡 프로젝트’인 <드래곤 워리어>와, 현재 추진중인 <로보트태권V> 실사영화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997년 한국 사회는 이른바 ‘IMF 체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편지>(97)는 그 해 겨울, 수많은 한국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최루성 멜로의 귀환’이었다. 서울 관객 82만 명. 이어지는 <약속>(98)도 서울에서 66만 명을 기록하며 대박을 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제작자는, 이번엔 극장을 눈물 바다로 만든 것.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하는 순간이었지만, 신철 대표는 여전히 “단지 진짜로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고 말한다. “영리하게 포인트를 맞춘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제 속을 들여다보는 걸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장르적, 기술적, 산업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던 신철 대표는 장정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00)을 통해, 말 그대로 ‘고생’을 한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건, 아직까진 한국 사회에서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일 거예요. 사회적 규범으로 어느 정도 걸러야 하는 기능도 필요할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술적 승화도 필요하니까요. 그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거죠.”

신철 대표에게 <거짓말>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 같은 작품이다. “한국영화의 심의 문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숙제예요. 그땐 정말 고생스러웠거든요. 툭하면 검찰에 불려가고, 필름 압수 당하고, 수색 영장 들어오고, 일간지 1면에 오르내리고. 고생은 정말 많았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한데, <거짓말> 같은 영화를 다시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모르겠어요.(웃음)” 결국은 법원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긴 했지만, 그땐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받았던 상황. 게다가 소스가 유출되어 불법 CD로 유출되면서 받은 현실적 타격도 컸다.



<구미호> 이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받았고, <거짓말>을 전후로 커다란 심적 고통을 얻었던 신철 대표에게 <엽기적인 그녀>(01)은 ‘봄날’ 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인터넷 소설을 절반 정도 읽은 상태에서 제작을 결정했어요.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그 좋은 원석을 곽재용 감독이 너무 잘 다듬었고요.” 당시로선 생소한 ‘인터넷 소설 영화화’였고, 주연을 맡은 차태현과 전지현도 그땐 ‘가능성’만을 지닌 배우였으며, 곽재용 감독은 사실 꽤 오랫동안 잊혀진 연출자였다. “저는 어떤 사람과 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기본적인 탤런트를 가졌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웬만하면 자세가 좋은 사람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저도 교만해질 때가 항상 문제였어요. 곽재용 감독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엽기적인 그녀> 할 때 그 탤런트와 자세가, 원작의 힘과 배우들의 젊은 파워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서울 관객 176만 명에 전국 관객 488만 명. 한국 사회에 ‘주5일 근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고 한국영화 최초로 ‘금요일 개봉’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러한 폭발적이며 스피디한 흥행력은 신철 대표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또 있었다.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엽기적인 그녀>가 한국에서나 재미있을 얘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홍콩에 이어 일본 시장에 진출한 <엽기적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중화권과 일본에서 모두 흥행한 유일한 한국영화인 셈. 하지만 아쉬움도 크다.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 불법 DVD가 적어도 1억 장, 많으면 3억 장이 팔렸대요. 동북아시아 지역에 퍼졌던 이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단 한 푼도 경제적 효과로 바꾸지 못했던 거죠. 참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리고 이런 얘기도 들었다. “작년에 어느 중국 대학생을 만났는데,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엽기적인 그녀> 때 왜 타임 캡슐을 만들어 팔지 않았냐는 거죠. 만약 그랬다면 아시아권에서 엄청나게 팔렸을 거라면서. 제작비 조달도 힘에 겨워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건데, 그런 부분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거죠. <엽기적인 그녀>를 브랜드로 좀 더 큰 시장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걸 다 날려버리고 만 거니까요.”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을 뒤로 하고 그는 태평양을 건너갔다. 이소룡을 디지털 캐릭터로 부활시키려는 <드래곤 워리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힘겹게 유족들로부터 3년 6개월의 초상권을 획득했고, 할리우드 기술 스태프들과 씨름하면서 보낸 3~4년의 시간.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신철 대표를 기다리는 건, 30년 만에 부활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표 캐릭터 로보트태권V였다.

사실 김청기 감독이 <로보트태권V>(76)을 다시 살려보자며 신철 대표를 찾아온 건 1999년이었다. 만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과거 'ARK'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는 꽤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로보트태권V>의 인터네가 필름. 신철 대표는 로보트태권V가 지닌 ‘캐릭터의 힘’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탄생한 지 30년인데 그 캐릭터나 콘텐츠는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요. 미키마우스가 80년이 넘었고, 일본에도 50년 넘은 캐릭터가 있지만 한국엔 없잖아요? 그리고 30년 정도 세월이 흐르면 어떤 ‘히스토리’가 생겨요.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그 무엇이 되는 거죠.” 게다가 태권도에 대해 리서치를 하면서, 그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엄청나게 큰 일을 해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권도를 우습게 생각했었는데, 조사하면서 이른바 ‘한류’의 근원이 태권도라는 걸 알게 됐어요. 189개국에서, 한국 인구보다 많은 7,000만 명의 사람들이 한국어로 태권도를 배우고 있으니까요. 엄청난 브랜드인데, 우린 그걸 잘 사용하지 못했던 거죠.” 그리고 ‘로봇’이라는 캐릭터는 미래 사업의 동력 중 하나였다. “로보트태권V는 히스토리와 태권도와 과학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한 몸에 녹여 가지고 있는 기묘한 캐릭터더라고요. ㈜로보트태권브이를 운영한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저희 팀의 능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캐릭터가 지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잘만 한다면 굉장히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2007년 1월 복원판을 재개봉시킨 신철 대표의 현재 프로젝트는 <로보트태권V>를 실사영화로 만드는 것. 4회짜리 웹툰 <브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웹툰을 장편 연재물로 확장시켰고, 그것은 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로보트태권V>를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지점을 생각하다가 <브이>라는 웹툰을 만났고 실사영화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때 <트랜스포머>(07)가 나왔죠. 사람들은 <트랜스포머>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 영화에 고마워요. 그런 영화가 흥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투자자들을 설득하기가 쉬워졌거든요.(웃음) <로보트태권V>는 <트랜스포머>보다 재미있을 거예요. 로보트태권V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등장할 것 같고요.”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