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강제규 - 패러다임을 바꾸다

 

 

  
<닥터 지바고>와의 운명적 만남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2009)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영화 말미의 비행기 내부 장면에 낯익은 사람 한 명이 앉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용화 감독과의 친분으로 카메오 출연한, 바로 강제규 감독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5년. 현재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그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짧은 순간이었다.

최근 한 세대 한국영화를 정리할 때 ‘강제규’라는 이름은 수많은 의미를 지닌다. 10년 전 그가 내놓은 <쉬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본격적으로 가동시킨 강력한 화약이었고, IMF 시기에도 한국영화계에 끊임없이 자본이 유입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쉬리>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고 <은행나무 침대>의 프리퀄인 <단적비연수>(2000)로 데뷔한 박제현 감독은 “기획이나 제작 툴에서부터 배급 상황, 영화 시장 등 <쉬리>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쉬리> 전과 후의 한국영화들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아주 극명하다”고 말한다. <쉬리>는 한국영화 체질 개선을 단 번에 이루었던 ‘신화적인 영화’인 셈이다.

강제규 감독은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마산 부림시장에서 주물 장사를 했다. 그렇게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는 나름 영화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친구네 집이 극장을 하는 덕에 심심찮게 영화를 볼 수 있었고, 학업 성적도 꽤 우수해서 경상남도 지역에서 명문으로 평가 받았던(당시는 평준화 이전이었다)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다. ‘공부는 해서 뭐 하나’라는 생각에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며 점점 고민에 빠졌고, 아버지가 사 주신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찍으러 다녔으며, 문학 서클에 들어가 시를 썼다. 생텍쥐페리, 리처드 버크의 소설과 고은의 시를 좋아했던 소년은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고 겨울방학에 동네 극장에서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이렇게 크게 다가오고,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인가. 도대체 영화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감각을 마비시키고 쇼크를 주는가. 영화에 나오는 사랑이 너무 애달프고 간절해 혼자서 열병을 앓았습니다.” 이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그는, 영화서적을 구해서 탐독하고 부산까지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충무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다
1981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반 때 합동영화사의 감독 공채에 합격하면서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당시 충무로는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처음 영화계에 나와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깊은 회의에 빠졌어요. 20개 제작사가 한국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오로지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해서였죠. 한국영화는, 최소 경비만 들여 한 달 만에 촬영이 끝나는 졸속 영화들이 양산됐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감독을 해야 할지에 대한 회의가 끊임없이 들었어요.”

그에겐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선택한 영화는 그에게 곧 ‘생활’이었고, 연출부 스태프로 일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홍보영화와 CF는 물론 <베스트극장>(MBC)의 대본을 쓰기도 했고, 영화 수입사에서도 일했다. “그때는 영화를 한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봤어요. 한국영화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제로였지요. 영화계는 춥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희망이 없었어요. 영화 하는 사람을 폄하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웠고요. 젊으니까 가난과 배고픔은 견딜 수 있었지만 ‘대학 나와 고작 영화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모멸감에 얼굴이 화끈거렸죠.”


이때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시나리오 작업이었고, 이 시기의 훈련은 이후 그가 거둘 성공의 탄탄한 밑거름이 된다. 그가 쓴 시나리오가 처음으로 영화화되었던 건 김성홍 감독의 하이틴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1991년엔 강우석 감독의 정치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스릴러인 <장미의 나날>(1994)과 갱스터 액션인 <게임의 법칙>(94)이 이어진다. 다양한 장르에서 실력을 쌓은 그의 시나리오의 구성은 점점 탄탄해져 갔는데, 특히 <게임의 법칙>의 시나리오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그는 충무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에겐 데뷔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2년에 <흉조의 눈>이라는 영화로 크랭크인 직전까지 갔던 것. 집단 변사 사건을 역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로서, 스릴러를 기본으로 추리와 미스터리와 멜로의 요소가 가미된, 다소 정치적 메시지를 지닌 영화였다. 당시 <스크린>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러한 포부를 밝혔다. “지금껏 많은 신인 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신인감독 특유의 신선미에서는 떨어졌다고 봅니다. 어딘지 서로 비슷한 느낌에서 탈피해, 비상식적이고 반전과 파격미가 공존하는 젊은 감독의 특징을 보이겠습니다. 형식미에 치우치는 우를 범하지 않고, 그리고 예술성과 흥행성 모두 잡으려는 욕심 없이, 겸손한 영상을 만들겠습니다.” 프로젝트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는 좌절했다기보다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흉조의 눈> 때 이미 ‘장보고영화사’라는 독립 프로덕션을 만든 바 있었던 강제규 감독은 1994년에 ‘영화발전소’라는 제작 집단을 만들어, 삼성의 계열사인 드림박스(비디오 유통사)와 함께 <공포 특급>(1994)이라는 옴니버스 비디오 영화를 제작한다. 김희철 감독과 공동 연출한 <공포 특급>은 당시 베스트셀러를 토대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것. 그의 장르적 관심이 잘 나타난 초기작이다. 여기서 강제규 감독의 영화 작업에 있어서 어떤 특징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팀 작업이다.

<쉬리>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단적비연수> <내 남자의 로맨스>(2004)의 박제현 감독, <베사메무쵸>(2001) <식객>(2007)의 전윤수 감독, <튜브>(2003)의 백운학 감독은 이미 영화발전소 시절부터 함께 했던 ‘팀’이었다. 이후 <연애술사>(2005)의 천세환 감독, <최강 로맨스>(2007)의 김정우 감독도 당시 강제규 감독의 작업실에 합류했다. 그들은 에어컨도 없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북적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그 이야기들은 강제규 감독에 의해 정리되어 조금씩 쌓여나갔다
   

특별한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 더 특별했던 <쉬리>
3~4년 전 데뷔할 수 있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비디오 영화로 몸을 풀었고, 2년에 걸친 프리프로덕션 과정을 통해 완벽을 기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그의 데뷔작은 <은행나무 침>(1996)였다. 당시 충무로에선 시나리오 작업을 주로 여관방에서 했는데, 강제규 감독은 작업을 하며 지겹게 봐 왔던 침대에서 문뜩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중국의 작가 링 탕이의 원안에 기초해 전생과 현세를 오가는 판타지 멜로의 시나리오가 탄생했다. 서울 관객 68만 명으로 그 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은행나무 침대>는 여러 모로 특별한 영화였다. <구미호>(1994)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제작자 신철은 이 영화에서 진일보한 컴퓨터그래픽을 보여주었고, 강제규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그런 기술력에 부응해 관객의 시선과 감정을 동시에 빼앗았다. 그 결과 한국영화는 판타지라는 신천지를 밟게 되었으며, 영화의 흥행과 함께 ‘전생 신드롬’이 불기도 했다.

다음해엔 영화공작소에서, 자신이 쓴 <깽판>이라는 시나리오로 김희철 감독을 데뷔시킨다. 그 영화가 바로 <지상만가>(1997). 신현준, 이병헌, 정선경 등 탄탄한 캐스팅의 청춘 드라마였지만, <지상만가>는 <은행나무 침대>만큼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이 영화를 통해 철저한 기획과 충분한 프리프로덕션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은 강제규 감독은, 영화발전소에 이어 1998년에 강제규필름을 설립해 <쉬리>(1999)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은행나무 침대> 끝나고 강제규 감독은 첩보전을 소재로 한 강렬한 액션 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쉬리> 이전엔 <대국전>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선악이 뚜렷이 대립되는 <대국전>의 구도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3년의 기획 회의와 2년의 시나리오 집필 과정을 통해 수많은 수정을 거쳐 탄생한 <쉬리> 시나리오는 멜로 라인과 액션 라인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10억 원 안팎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당시, 30억 원의 제작비와 80회의 촬영회차는 파격이었다.

<은행나무 침대>, <태극기 휘날리며>포스터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폭발적 흥행은 그런 파격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들었다. <서편제>(1993)의 기록을 깨며, <타이타닉>(1997)의 한국 관객수마저 돌파하며, <쉬리>는 전국에서 58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의 의의는 숫자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한국영화는 묘한 자신감에 휩싸였으며, 영화 자본은 급격한 변동을 겪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분단 상황에서 펼쳐지는 리얼한 액션 영화에, 관객과 평단은 물론 정치권마저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부 각 부처에서 경쟁적으로 이 영화를 관람했고, 당시 어느 국회의원은 “DJ의 햇볕 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말했으며, 국방장관은 “느슨해질 수 있는 장병들의 대적관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영화를 적극 활용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퇴행적 민족주의라는 평가도 있었다. 철저히 장르 영화를 기획했던 강제규 감독은, 이러한 ‘소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다가온다면, 반은 내 잘못이고 반은 우리가 처한 현실 때문입니다.”
  

유사 할리우드 전략. “파이를 늘려야 한다”
<쉬리>가 개봉했을 당시 <씨네21>의 20자평을 읽는 건 꽤 흥미롭다. 네 명의 평자의 별점 평균은 세 개 반(다섯 개 만점).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이 영화가 지닌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사 할리우드 영화’로 오리지널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실용주의 전략(강한섭)” “액션과 미스터리, 멜로를 알맞게 배합한 흥행 폭탄(박평식)” “한국 관객만 보기는 아까운 감성 첩보영화(유지나)” “상업주의 전략을 완성시킬 줄 아는 장인들의 영화(이명인).” <쉬리>는 장르와 상업성과 한국적인 것이 황금비율로 배합된, 거의 완벽한 상업영화였던 셈이며 6백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수는 그것을 증명했다.

영화<국가대표>에 카메오로 출연한 강제규 감독

“대전제는 간단합니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들자’입니다. 동시대성이 중요합니다. 관객은 외국영화에서는 봤지만 한국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그 무엇을, 한국영화 속에서 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름대로 정착시켜 나갈 것입니다.” 1999년에 필자와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이야기는 이후 그의 행보에서 꾸준히 발견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쉬리> DVD 서플먼트에서 말하듯 “<쉬리>는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봐왔던 것들을 한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소재로 한국만의 그릇에 담아냈다는 데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스필버그 식의 ‘롤러코스터 무비’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그는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그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비주얼과 장르적 공식을 ‘한국화’함과 동시에 ‘국제화’시키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사 할리우드 전략’이라는, 어쩌면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는 표현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다. “‘유사 할리우드’라는 단어, 참 잘 지은 것 같아요. 할리우드 식으로 포장해내는 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니까요. 세계 영화계에서 1등을 달리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와 유사하게 가려고 노력하는 건 필요한 전략이죠. 헛갈릴 건 없습니다. 할리우드와 유사한 방식을 구사하든, 우리만의 고유한 빛깔을 담기 위해 노력하든, 둘 다 필요한 거니까요. 두 개 다 맞아요. 입체적인 발전이 필요한 거니까요. 나는 내 기호를 살릴 수 있는 분야가 전자라고 보는 거고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할리우드적인 전략을 통해 거둔 그 성과다.

“<쉬리>는 규모로는 절대로 할리우드적일 수 없는 영화죠. 하지만 흥행 성적은 할리우드 영화를 능가했어요. 우리는 그 방법론을 2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중요한 건 할리우드의 제작 규모가 아니라 고도의 대중성을 추구하는 영화 문법과 스타일입니다. 우리가 연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유사 할리우드 전략’과 함께 이 시기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주장했던 명제는 “파이를 늘려야 한다”였다. “<쉬리> 이전에 존재했던 한국영화에 대한 논의 구조는 그다지 도전적이지 못했어요.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정해진 파이를 나누는 것보다는 파이를 늘리는 것이 더 중요해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쉬리>는 시장 확산과 발상의 전환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할 수 있고요.” 그는 한국영화가 ‘가능성 있는 산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쉬리>로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한국영화의 파이가 커지면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화가 산업임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나처럼 영화의 산업화를 놓고 역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참 묘한 거다. 영화가 산업으로서 매력을 상실했을 때 전세계 (각국의) 영화가 자멸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프랑스는 물론 가까운 일본과 대만까지.” 그리고 한국영화가 진정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선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투자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작비가 50억 원이든 100억 원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기획 단계에서 적절한 제작비와 결과를 산출하는 게 중요하죠. 시나리오를 꼼꼼히 분석하고, 어떤 배우와 스태프가 결합됐는지 살펴보면 적절한 제작비가 나와요. 한국영화는 이것을 분석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혼선을 빚어왔죠.”

  
감독에서 제작자로, 그리고 할리우드와 글로벌로
<쉬리>가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면서 강제규필름은 탄탄한 자본력을 지니게 된다. 강제규 감독은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에 의해 ‘아시아 스타 50인’에 선정되었고, 그의 행보는 충무로를 넘어 전세계와 접속하게 된다. <쉬리>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5년 동안, 그는 자신의 시스템을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먼저 강제규필름 내에 ‘드림 팀’을 구성했다. 스필버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시스템의 축소판인 이 팀은, 강제규 감독이 만들고 싶은 영화의 컨셉트와 마인드를 공유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팀 작업에 능숙했지만, <쉬리> 이후의 팀은 좀 더 큰 규모이며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다. ‘드림 팀’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의미를 관철시키기 위해 고도의 컨셉트 영화를 기획함과 동시에 작업의 효율성을 꾀했다. 하나의 아이템이 시놉시스로 만들어지면, 모니터링 과정을 통해 그 아이템을 계속 진행시키고, OK 사인이 떨어지면 팀을 통해 시나리오 작업 진행하는 방식은 강제규필름만의 노하우였다.

KTB네트워크와 제휴하며 57억5천만 원 큰 돈을 투자 받을 수 있었고, 음반과 게임과 캐릭터 사업과 인터넷과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총망라한 아이스크림 엔터테인먼트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인터넷 방송을 시도하기도 했고 극장업에도 손을 댔다. 그리고 2004년엔 명필름과 합병하면서 MK픽쳐스를 결성하면서, 코스닥에 상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 강제규’는 ‘감독 강제규’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손익분기점을 겨우 맞추거나 손해보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몽정기>(2002) 정도가 이 시기 강제규필름의 흥행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크레디트에 ‘감독 강제규’가 박힌 영화를 기다렸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등장했다. 사실 그는 <쉬리>의 차기작으로 할리우드 현지 스태프와 배우를 기용한 SF를 기획하고 있었다. <쉬리 2>도 이야기가 나왔다. 몽고를 다녀온 후엔 칭기스칸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TV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2년 동안 준비하던 SF 프로젝트를 접었다.

그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쉬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분단 이데올로기에 자극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를 구상하진 않았다. 그에겐 장르영화에 대한 갈증이 계속 있었고,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분단 현실은 리얼리티와 더불어 많은 흥미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더 없이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태극기 휘날리며>현장 중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모두 그런 ‘상업적’ 동기로 만든 영화들이었고, 그 영화들이 대중적 호응을 얻으면서 거꾸로 역사와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3년에 걸친 준비 작업을 거친 <태극기 휘날리며>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의 흥행사에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그가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으며, 북미 시장에 개봉되면서 할리우드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미국의 거대 에이전트인 CAA는 강제규 감독을 영입했다. CAA가 아시아 감독을 받아들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할리우드 진출의 의미 앞에서 그렇게 들뜬 것 같진 않다.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 감독들이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을 많이 했죠. 과거에는 할리우드에 가서 감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와 (기타 지역의) 비주류가 병행하는 상황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예측 가능한 시장과 중국이라는 잠재 시장을 합하면 미국보다 더 큰 시장입니다. 이제 아시아 감독이 미국 가서 감독하는 것이 할리우드 진출이 아닙니다. 힘을 결합해 미국 시장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새로운 할리우드 진출법이 될 겁니다.”

그는 단지 할리우드의 용병이 되어 그곳에서 감독으로 인정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영화와 아시아영화의 이름으로, 할리우드와 대등한 관계에서 제휴하는 방식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다. 그의 차기 프로젝트 앞엔 ‘할리우드’보다는 ‘글로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사실 할리우드 메이저들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벌써 내 영화 한두 편은 개봉했을 것이다. 단순히 연출만 해 달라는 제안은 스무 번도 넘게 받았고. 하지만 내 시나리오, 우리 제작으로 할리우드를 설득하는 일은 정말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구한다.” ‘할리우드 감독 강제규’가 아닌 ‘한국감독 강제규’가 찍은 영화가 전세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것. 그가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