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14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린 언제쯤 저런 영화제를 치르나 부러워하던 차에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든다는 거예요. 그때 한국영화계가 똘똘 뭉친 이유는, 그런 서러움과 부러움 때문이었다고 봐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단지 내려와서 개막식에 참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아무튼, 국제 영화계에서 ‘코리아’라는 브랜드는 미미한 존재였던 시절에 강수연의 수상은 한국영화계에 하나의 사건이었고, 그녀 자신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충무로에서 ‘배우 강수연’의 주가는 급상승했고 수많은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출연작을 줄이는 전략을 선택한다. “어렸을 때부터 바쁘게 겹치기 출연을 했잖아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잘 할 수도 없고, 소화가 안 되는 거예요. 영화를 평생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를 소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에 한 편에서 많으면 두 편으로 줄인 거죠. 일부러 조절을 했어요. 많은 문제가 있었죠. 수입도 줄고…. 그리고 대중들은 배우가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걸 좋아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갈등도 많이 했는데, 후회하지 않아요. 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영화라는 꿈, 평생 배우의 소망 주철환 교수는 저서 <스타의 향기>에서 강수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0년 연기를 했다고 다 강수연처럼 되는 건 아니다. ‘끼’도 있고, ‘깡’도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이 ‘끼’이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목숨 걸고 안 하는 것이 ‘깡’인데, 그녀야말로 이 둘을 고루 지닌 사람이다.” 이 ‘끼’와 ‘깡’을 바탕으로, 강수연은 1980~90년대에 유연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해간다. 1980년대부터 꿈틀거리던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인 박광수, 장선우, 이현승 등과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에서 만났고, <그 여자, 그 남자>(1993)에선 당대의 트렌드였던 로맨틱 코미디와 조우했다. 곽지균, 장길수 감독과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웨스턴 애비뉴>(1993) <깊은 슬픔>(1997) 등에서 꾸준히 작업하며 ‘멜로 히로인’이 되었고,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에선 그녀의 멜로 연기에 정점을 찍었다. 1991년엔 대만 영화 < 낙산풍>에 출연했는데, 지금은 수많은 한국 배우들이 해외 영화에 출연하지만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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