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배우 강수연 - 평생 배우의 꿈


 

  
네 살 때 카메라 앞에 서다
여배우의 위대한 계보가 있다. ‘여걸’이었던 최은희, 지성과 감성을 겸비했던 문정숙, 청춘 멜로드라마의 엄앵란, 한국적 어머니상을 정립한황정순, 관능적이었던 도금봉,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문희-남정임-윤정희….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계보도는 1970년대에 끝나 버린다. ‘뉴 트로이카’인 정윤희-유지인-장미희가 등장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었고, 호스티스 영화와 에로티시즘 영화가 이어지던 시기에 우리의 여배우들은 카메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강수연은 왔다. 아니, 사실 그녀는 이미 와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카메라 앞에 섰던 연기자. 인터뷰를 위해 찾아본 자료에는 1971년이 데뷔 연도로 되어 있기에 팩트 확인을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 전부터 했어요. 한국 나이로 네 살 때니까…. 몇 년에 데뷔했는지, 한 번 계산해보세요.(웃음) 데뷔는 영화로 먼저 했죠. TV 드라마는 초등학교 들어가서 했던 것 같아요. 그때 TBC(동양방송)에서 ‘어린이 드라마’라는 게 생기면서, 주인공을 했죠. 그 전엔 영화, 연극만 했어요. 연극은 아동극이 아니었고, 국립극단에서 했던 연극이었어요.” 충무로에 ‘아역 배우’가 몇 명 없던 시절, 강수연은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의 매일 같이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영화사에서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요일을 편하게 쉬었던 게 딱 두 번”이었다고 회상할 만큼 정신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강수연에게 ‘연기’는 어떤 자의식에 의한 건 아니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 ‘아 좋아’ 이런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기를 한 거예요. 그때는 내가 연기를 한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아저씨들이 와서 ‘너 이렇게 해봐’ ‘웃어봐’ 그래서, 그대로 하면 ‘아이 예쁘다’ 이런 거죠. 그렇게 유아기,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워낙 오래 하다 보니까 그 생활이 익숙해지고 현장에 굉장히 적응을 잘하는 아이였던 거죠.”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했지만 올드 팬들에게 남아 있는 ‘아역 강수연’의 이미지는 <별 3형제>(1977) <비둘기의 합창>(1978) <슬픔은 이제 그만>(1978) <어딘가에 엄마가>(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8) 같은, 꿋꿋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감동적인 삶을 다룬 작품들. 그리고 TBC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1971)에서 맡았던 캐릭터 ‘이쁜이’는 어린 시절 그녀의 별명이 되기도 했다. 하이틴 때는 <깨소금과 옥떨메>(1982) 같은 ‘명랑 영화’도 만날 수 있었고, TV 드라마 <풍운>(1982)에선 어린 명성황후 역을 맡기도 했다(24년 후 영화 <한반도>(2006)에서 강수연은 다시 명성황후 역을 맡는다).


전형적이지 않은, 모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언젠가는 만나야 할 고민은 다가왔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TV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에 출연할 즈음이었다. “계속 연기를 할지 말지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어요. 계속 연기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고요.” 강수연은 <씨네21> 인터뷰에서 그때를 “관객의 입장으로 영화를 너무 좋아하게” 된 때였다고 말한다. “내가 출연한 영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너무 좋고, 극장 앞만 걸어가도 가슴이 막 설레고. 그 나이 또래에 영화를 좋아하는 청소년과 똑같은 감정을 느낀 거죠. 내가 하는 이 일을 기왕이면 좀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공부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진지한 고민 끝에 “나도 모르게 시작한 연기지만 정말 잘 시작한 것이라는 인식과, 연기자는 미치도록 매력이 있는 직업이며 평생에 승부를 걸 직업으로 후회 없이 죽도록 열심히 하자는 결심”에 이른 강수연은 ‘영화’라는 매체가 자신에겐 더 흥미롭다고 생각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2001년에 <여인천하>에 출연하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오로지 영화에만 출연한다. 이른바 ‘성인 연기자’로서 강수연의 첫 시도는 김수형 감독의 (1985).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 영화의 실패는 이후 그녀가 영화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슬픔은 이제 그만>중

당시 감독들의 평가를 보면, 당시 강수연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고래사냥 2>(1985)의 배창호 감독은 “아직 어린 배우지만 ‘깡다구’가 있고 무척 열성적이다. 본인이 선택한 작품을 위해서 다른 계획을 모두 보류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기에 전념하는 진지한 자세를 높이 사줄 만하다”며 갓 스무 살이 된 여배우의 잠재력을 이야기했고,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의 이규형 감독은 “집념이 강한 연기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단계에 다다르지 못한 연기를 할 땐, 주위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다시 해야 직성이 풀린다”며 어리지만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강수연을 평가했다. 임권택 감독은 인터뷰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씨받이>(1987)에 강수연을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십팔 세 철 없는 애로부터 씨받이로 가서 한 일 년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거를 거기서 일 년 후든 이 년 후든 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고 났을 때 연기가 저 앞하고 뒤가 전부 커버될 만한 충분한 기량을 가진” 배우는 강수연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녀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였다. 서너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했고, 1987년에 개봉한 작품만 무려 6편이었다. 영화의 성격은 다양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청춘 스타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흥행작이었고, <연산군>(1987)에선 요부 장녹수가 되었다. <감자>(1987)에선 당찬 아낙네 복녀 역을 맡았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에선 거칠게 살아가는 창녀였다. <됴화>(1987)에선 숙명과 업보의 인생을 살았고, <씨받이>(1987)에선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대리모가 되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배우가 보여주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폭 넓은 스펙트럼이었고, 역할엔 ‘극단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강수연적인 것’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소설가 전혜성은 강수연에 대한 배우론에서 “그녀의 입김이 닿는 순간, 어떤 악하고 비천하고 암담한 현실도 발랄하고 매력적이며 또 튀는 물고기처럼 생생하고 낙천적인 우주로 변해버린다. 따라서 그녀가 만들어낸 ‘강수연적 창녀’ ‘강수연적 씨받이’ ‘강수연적 조선시대 새댁’ ‘강수연적 아낙네’ 그 모든 것이 일련의 발랄한 1980년대적 현대성을 짙게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역할을 철저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할 줄 아는 배우 강수연이 지닌 매혹적인 능력의 일부”라고 말한다. 강수연은 과거 선배 여배우들이 지녔던 어떤 ‘전형성’에서 벗어나, 일견 모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때 <씨받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안겨준다.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시 강수연은 한국영화의 해외 업무를 관장하던 영화진흥공사로부터 영화제에 참석하겠냐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사실. 폐막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녀는 베니스에 있지 않았고, 수상 결과가 발표된 후에 국내에서 치러진 자축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 스타라는 이름의 이면과 그림자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과 전도연의 ‘오픈 토크’가 있었을 때, 전도연은 <밀양>(2007)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저 여배우는 어떤 작품을 했니? 스타니? 티켓 파워가 있니? 그 사람들 눈에는 ‘쟤 어디서 나타난 애지?’라는 거였어요. 그런 시선들이 느껴지니까 제가 기 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당당해지더라고요.” 이때 전도연의 말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무슨 이야기인지 100퍼센트 이해하겠다’는 듯 수긍의 눈빛을 띠며 곁에서 미소 짓던 강수연의 표정이었다. 베니스영화제 수상 2년 후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다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1980년대에 ‘월드 스타’라는 이름은 남 모를 아쉬움과 서러움을 지닌 명예였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게스트로 혹은 심사위원으로 외국의 영화제를 다니며, 그녀는 많은 것을 느꼈다. “저는 1980년대부터 해외 영화제를 다녔잖아요. 그때 너무너무 설움을 당한 거예요. 당연히 VIP로 초대를 받았지만 ‘넌 누구니?’ 이러는 거죠. 한국에서 온 배우라고 그러면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 그러고. 한국엔 자국 영화가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다들 한국영화에 대해 무지했고, 한국영화계도 해외 시장에 대해 무지했죠.”

그녀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14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린 언제쯤 저런 영화제를 치르나 부러워하던 차에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든다는 거예요. 그때 한국영화계가 똘똘 뭉친 이유는, 그런 서러움과 부러움 때문이었다고 봐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단지 내려와서 개막식에 참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아무튼, 국제 영화계에서 ‘코리아’라는 브랜드는 미미한 존재였던 시절에 강수연의 수상은 한국영화계에 하나의 사건이었고, 그녀 자신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충무로에서 ‘배우 강수연’의 주가는 급상승했고 수많은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출연작을 줄이는 전략을 선택한다. “어렸을 때부터 바쁘게 겹치기 출연을 했잖아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잘 할 수도 없고, 소화가 안 되는 거예요. 영화를 평생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를 소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에 한 편에서 많으면 두 편으로 줄인 거죠. 일부러 조절을 했어요. 많은 문제가 있었죠. 수입도 줄고…. 그리고 대중들은 배우가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걸 좋아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갈등도 많이 했는데, 후회하지 않아요. 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영화라는 꿈, 평생 배우의 소망
주철환 교수는 저서 <스타의 향기>에서 강수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0년 연기를 했다고 다 강수연처럼 되는 건 아니다. ‘끼’도 있고, ‘깡’도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이 ‘끼’이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목숨 걸고 안 하는 것이 ‘깡’인데, 그녀야말로 이 둘을 고루 지닌 사람이다.” 이 ‘끼’와 ‘깡’을 바탕으로, 강수연은 1980~90년대에 유연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해간다. 1980년대부터 꿈틀거리던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인 박광수, 장선우, 이현승 등과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에서 만났고, <그 여자, 그 남자>(1993)에선 당대의 트렌드였던 로맨틱 코미디와 조우했다. 곽지균, 장길수 감독과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웨스턴 애비뉴>(1993) <깊은 슬픔>(1997) 등에서 꾸준히 작업하며 ‘멜로 히로인’이 되었고,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에선 그녀의 멜로 연기에 정점을 찍었다. 1991년엔 대만 영화 <낙산풍>에 출연했는데, 지금은 수많은 한국 배우들이 해외 영화에 출연하지만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1990년대 그녀의 행보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른바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들이다. 1990년대에 강수연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였다. ‘일과 사랑’이라는 화두를 다루며 한국영화에 본격적인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온 <그대 안의 블루>, 공지영의 원작을 영화화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여성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엔 모두 강수연이 있었다. 당시의 다채로우면서도 적절했던 선택에 대해 강수연은 이렇게 말한다. “배우 개인의 취향보다는, 사회적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빨리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는 개인의 일기장이 아니니까요. 관객이 무엇을 원하고, 문화적 흐름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에 편승을 해야죠. 사실 제 취향이야 너무 심플하죠. 난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해요.(웃음)”

긴 세월에 걸쳐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어도 ‘기억에 남는 작품’ 몇 편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해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없어요”였다. 사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도 ‘대표작’이나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물어올 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고, 어떨 때는 “모든 작품으로부터 배신 당한 느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촬영에 들어가면 배역에 빠져 그 연기가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개봉 후에 그 영화를 보면 자신에 대한 배신감마저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찍으면서 정말로 서른 살쯤엔 출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영화가 끝나자 언제 그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안 믿는데, 정말 잊어 버려요. 그게 내 뇌 구조인 것 같아요. 지금 이걸 하고 있으면 이게 다라고 생각하는데, 끝나고 나면 싹 잊어요. 어떨 땐 전작에서 맡았던 역할 이름도 몰라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요. 아마도 아역 시절에 잊기 위한 노력과 훈련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맡았던 역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렸을 땐 작품이 끝나면 그걸 잊기 위한 트레이닝을 하곤 했는데, 이젠 트레이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동적으로’ 잊어버려요.”

하지만 그녀의 뇌리에 항상 박혀 있는 생각은 ‘평생 배우’에 대한 꿈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올해 12월엔 새 영화의 크랭크인 현장에 그녀는 서 있을 것이다.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애정과 인연을 넘어 이젠 운명이 되어 버린 ‘배우’라는 직업.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토크’에서 강수연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저에게 꿈인 것 같아요. 좋은 꿈일 수도 있고 나쁜 꿈일 수도 있고, 영화는 꿈속에서 헤어나지 않는 나의 인생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박하지만 확고한 신념을 전하며 이야기를 닫았다. “지금까지 어떤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온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꿈이 있어요. 내가 정말 70살 이렇게 되었을 때, 예를 들면 <집으로…> 같은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사랑 받고 연기도 잘하는, 그런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게 제 꿈이죠.” 조만간 밝혀질 그녀의 차기작 소식과, 내년 즈음엔 스크린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그 모습에서, 좀 더 영글어지고 다시 한 번 새로워진 ‘배우 강수연’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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