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배우 최민식 - 뜨거운 삶의 배우

 

 



배우라는 직업의 속성이 타인의 삶을 관객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지만, 최민식만큼 ‘산다는 것’의 느낌을 ‘찐하게’ 전달하는 배우는 흔치 않다. 이것은 단순한 몰입이나 체중 조절 혹은 헤어 스타일 같은 외적인 요소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캐릭터 이전에 ‘삶’에 대해 고민한다. 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마스터클래스에서 그는 자신의 연기론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인간을 표현하는 직업이죠. 배우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삶을 표현해요. 그래서 사람을 벗어난 작업은 있을 수 없어요. 배우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거고요.”

박찬욱 감독의 “‘핫’한 연기는 최민식이 최고”라는 말도,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삶에 대한 ‘핫’한 태도를 전제한 후에 가능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뜨겁다.’ FTA와 관련된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 그는 20여 군데 초청 강연을 다니며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 칸영화제에선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배우 개런티와 관련해 구설수에 올랐을 땐 기자회견장의 카메라 앞에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굳이 저렇게 손해 보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행동주의자다. 그러면서 그는 실수에 대해 반성한다. 최근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때 대중의 비난을 받았던 광고 출연에 대해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다. (중략) 배우가 광고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그는 배우라는 존재에게 ‘삶의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스터클래스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조금 울퉁불퉁하게 살면 어떤가요. 인생에 굴곡이 있어야 연기할 때도 풍부한 표현이 가능한 거죠. 배우라는 직업은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야 하니까요.”



하길종 감독의 영화에 끌려 영화를 꿈꾸었던 최민식은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극단 ‘뿌리’에 연구단원으로 들어간다. 19세의 연극 배우. 이후 그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시작했다. “그때 배운 건, 연기의 기본기와 테크닉만은 아니었죠. 그건 연기자로서의 인격을 의미하기도 해요. 저는 연극에서 인격을 배웠어요. 연기자로서 어떤 태도와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배운 거죠.” 마스터클래스 때의 회상이다. 그리고 대학 시절 스승인 안민수 교수는 최민식이 배우로서 성공하는 데 있어 든든한 뿌리가 되어 주셨던 분.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주변의 든든한 멘토들이 있었기에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연극배우로서 나름 탄탄한 길을 걷게 된다. 1984년엔 <에쿠우스>의 주인공인 알렌 역에 뽑히며 인정 받았지만, 입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안타깝게 출연하지 못했다(최재성이 대신했고, 6년 후 최민식은 <에쿠우스> 무대에 선다). 그리고 연극 배우로서 어느덧 10년 차에 접어들던 시기, 그는 한 편의 TV 드라마를 통해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다. <야망의 세월>(90)의 ‘꾸숑’은 대중에게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알린 첫 캐릭터. 당대 최고의 작가 나연숙은 “꾸숑 역할은 절대적으로 신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에쿠우스>에 출연 중이던 최민식은 그렇게 발탁되어 대중과 만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암흑가로 진출했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인간애를 지닌 ‘꾸숑’은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다소 과장된 연극적 톤의 연기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강렬한 눈빛과 굵은 연기 선은 ‘터프가이 꾸숑’을 잘 살렸고 박근형 강부자 유인촌 같은 쟁쟁한 연기자들 속에서 최민식은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첫 성공은 그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인기라는 것을 얻은 거죠. 연극 할 땐 석 달에 50만원 받은 게 최고였는데, 광고 한 편 찍었더니 700만 원을 주는 거예요. 통장을 보고서 잠을 못 잤어요. 사람이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선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변해요. 지금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정신 없었을 때예요. 제가 대단한 놈이 된 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이어지는 드라마에서 그는 ‘꾸숑’만큼 사랑 받지 못했다. 이때 찾아온 TV 드라마 <서울의 달>은 또 하나의 발판이 되었던 작품. 연극영화과 1년 후배인 한석규가 맡았던 ‘제비족’ 홍식 역할을 원래 맡기로 했지만, 순박한 시골 청년 춘섭을 통해 그는 대중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의 성공과는 별개로, 이후 그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배우 최민식. 그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넘버 3>(97)의 마동팔 검사 같은 ‘강력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최민식의 첫 영화 현장 경험은 박종원 감독의 데뷔작 <구로 아리랑>(89)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출연한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노동 운동을 방해하는 프락치 진석. 상업영화권에선 최초로 노동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였고, 20장면 이상이 삭제 당한 채 개봉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그때 데모 신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촬영장 근처의 농성 노동자들이 직접 엑스트라로 참여했는데,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가 버스 밑으로 딸려 들어가고, 주변에선 울고불고…. 그 생생한 순간들은 잊지 못하죠.” 박종원 감독과 두 번째로 만나 ‘김 선생’ 역을 맡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92)은 아이들과의 즐거운 일들과, 몇몇 사고와 해프닝으로 추억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넘버 3>을 만나기 전, 그의 영화 경험이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장길수 감독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90)에서 그가 맡은 역은 주인공(손창민)의 친구인 미대생. 서양화가였던 형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한 채 현장에 나갔지만, 감독은 당장 집어 치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명 배우라 무시 당한다는 생각에, 그는 장길수 감독에게 대들었다. “나중에 감독님이 ‘그때 너에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며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저는 개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있었던 시절이었죠.”

<쉬리>/<조용한 가족>포스터

지우고 싶은 작품도 있다. 프랑스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우리 사랑 이대로>(92)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 출연했던” 영화로, 견해 차이로 감독과 대립각을 세웠다. “프랑스가 참 멋진 나라였다는 것 정도만 생각나요. 필모그래피에 오점으로 남는 영화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죠. 아무 준비 없이 임해서 낭패를 본 경우였어요.” <사라는 유죄>(93)도 교훈을 준 영화다. 아는 분의 소개로 한두 장면에 특별출연 형식으로 등장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97)을 포기하고 한 영화였죠. 몇 장면 안 나오는데, 개봉할 때 보니까 포스터에 얼굴이 제일 크게 박혀 있더라고요. 아는 사람 부탁에 휘둘리지 말고,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었어요.”

동국대학교 제자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유현목 감독의 <엄마와 별과 말미잘>(95)에 양아치 역으로 잠깐 출연한 것 외엔, 5년 가까이 영화 현장을 떠나 있었던 최민식을 다시 부른 작품은 <넘버 3>였다. 한석규의 추천으로 송능한 감독을 만나 오디션을 치른 그는 다혈질 검사 마동팔 역을 맡았고, 물고기가 물을 만나 듯 그의 영화적 에너지는 폭발한다. 송능한 감독의 날카로운 풍자 정신과 먹물에 대한 혐오와 특유의 페이소스는, 최민식에게 또 하나의 캐릭터를 선사했다.

이어지는 <조용한 가족>(98)은 “김지운이라는 인간을 알기 위한 작업”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누나인 연극배우 김지숙을, 배우로서 워낙 좋아했죠. 그리고 예전에 김지운 감독이 연극 연출을 할 때 섭외를 받았는데 드라마를 핑계로 거절한 적도 있었고요. 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던 차에 출연 제의가 왔어요.” 가족 중 일원으로만 보이면 되는, 큰 부담 없는 역할이었고 결과도 좋았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코미디를 ‘제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배우는 반드시 코미디를 해봐야 해요. 개인기로 사람을 웃기는 것은 개그맨의 역할이고, 배우는 상황적 모순 때문에 허탈하고 쓴웃음을 짓게 하는 연기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조용한 가족>은 코미디 연기의 핵심인 타이밍이 잘 맞았어요.” 그리고 이즈음, 최민식은 TV 드라마를 접고 영화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연극과 영화를 오간다. 차기작으로는 한국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인, 강제규 감독의 <쉬리>(99)가 기다리고 있었다.



송강호는 선배인 최민식에 대해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배우로서의 매력과 덕목을 교과서처럼 가지고 있는 연기자”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나이의 깊이와 삶의 성찰이 가식과 허위가 아닌 신뢰감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면은 후배 배우로서 모델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파이란>(01)의 송해성 감독은 최민식이 “눈가의 주름조차 연기의 디테일로 사용하는” 배우라고 말하고, 류승완 감독 역시 최민식을 <주먹이 운다>(05)의 길거리 복서 강태식 역에 초대하며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이 이 역에 안성맞춤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은 “최민식이 보여준 격렬한 연기는 자신의 표출을 겨냥한 게 아니라 자신을 그냥 덮어주기 위한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영화제작자 심재명은 “최민식은 계산에 의한다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마음을 던지는 연기자다. 정말 묘한 건 그의 파워풀한 연기가 결코 ‘오버’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라고 평한다.

‘영화배우 최민식’의 이러한 ‘인장’은 <쉬리> <해피엔드>(99) <파이란>(01)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완성된다. 최민식은 정형화된 캐릭터인 <쉬리>의 박무영에 입체적인 느낌을 부여했고, <해피엔드>의 서민기를 통해 정적인 캐릭터가 지닌 미묘한 감정과 예상치 못한 파워를 보여주었다. 그가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휩쓸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해피엔드>에서, 상상 속의 살인 장면이 편집 과정에서 현실로 바뀌어 버렸던 것. 그는 서민기가 절대로, 그런 짓을 할 만큼 용의주도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설하듯 난도질하는 그 장면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마치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된 심정이죠.”

하지만 3류 건달이자 ‘대한민국 호구’ 강재 역을 맡은 <파이란>은, <해피엔드>의 아쉬움을 채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강재보다 더 강재스럽다. “떠들썩한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솔직하고 근본적인 멜로가 될 거라는 생각”에 출연한 이 영화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예쁜 인간들이 예쁜 카페에 앉아 예쁜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는 예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걸레’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새싹처럼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다. 이 영화는 연기 경력 20년을 넘긴 한 배우에 대한 새삼스런 발견이었으며, 그는 나름의 연기 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후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무당’이라는 존재와 비교하곤 했다. “배우는 무당이고, 배역은 귀신이고,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듯 그 캐릭터를 불러내는 것이 연기인 거죠. 무당이라는 게 신내림을 받는 팔자잖아요. 귀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알 거예요. 귀신이 몸 속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내 몸을 빌어 실컷 놀다가 귀신이 빠져나갔을 때 버려진 내 몸뚱아리가 얼마나 허전한지를…. 그 작업을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파이란>(좌) <올드보이>(우)

그리고 한편으로 연기는 그에게 ‘사기’다. “연기자가 한 인간을 표현한다는 게, 내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인물로 그 사람인 듯 사기를 치는 건데,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 건데, 비록 거짓말이고 사기지만 나름대로는 진실하게 사기를 치려고 노력해요.” 이러한 말들은 젊은 시절에 한때 가졌던 “배우가 최고!”라는 식의 우쭐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직업 배우’라는 것을, 카메라 앞에서 몸으로 표현할 때는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배우의 고독’을, 자신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운명이고 팔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연기라는 것엔 분명히… 뭔가 있다는 거죠.”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르신들과 작업했던 <취화선>(02)은, 혹시 건방져졌을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었다. 당시 그의 모토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데뷔 당시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충만했어요. 정말 순수한 시절이었죠. 저도 이제는 때도 많이 묻고,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명확해졌다고 느껴요. 배우로서 허영심도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는 것 같고. 거기서 탈피하고 싶었어요. 해병대 극기 훈련 들어가는 심정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었던 거죠.”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처음 밟았던 그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03)로 두 번째 발자국을 남긴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영화상 트로피를 거머쥔 이 영화에서 그는 자신의 한계를 향해 나아간다. 백은하는 <우리시대 한국배우>에서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다”며 이렇게 평한다. “분노에 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속이 터져라 소리 지르고, 복받치는 울음을 질러버리고, 스크린 너머로 화염을 토해버리는 것이 최민식의 힘이다. 그러나 이 화염방사기의 내부엔 물이 가득하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가득 품은 속내, 지나칠 만큼 감수성 넘치고 민감한 그의 심장은 쉬지 않고 눈물을 뿜어댄다.”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대포 한 잔 하는 기분으로” 찍은 <꽃피는 봄이 오면>(04)에 이어 <주먹이 운다>(05)에서 다시 한 번 ‘독한’ 연기를 보여준 그는 <친절한 금자씨>(05) 이후 4년 동안 영화를 쉬었다. 그리고 만난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09)은 최민식의 여백과도 같은 영화. “여행 가는 기분으로 찍은” 이 영화에서 그는 한 노동자의 유해를 안고 네팔의 4,000m 고원을 오른다. 그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관객들이 ‘최민식 올해 몇 살이야?’ 그러는 게 아니라, ‘어, 최민식이 어느새 저렇게 늙었네? 그런데 재밌다. 저 사람 영화 볼 만해’라고 만드는 게 나의 몫이죠. 그러다 밀려나면 자장면 집이나 하는 거고….(웃음)”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 최민식은 편안해 보인다. 꽤 긴 수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 최민식. 조금씩 들려오는 그의 신작들 소식 속에서, 최민식의 ‘재밌고’ ‘볼 만한’ 영화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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