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송길한 - 시나리오의 교과서

 


 
그가 임권택 감독과 함께 1980년대에게 합작한 영화들은, 당대 가장 진지한 작품들이었으며 현재도 ‘교과서’로서 손색 없다. 최동훈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이 한국 시나리오는 잘 안 읽는데 그 중에 걸작들이 굉장히 많다. 난 요즘도 작업실에서 잘 안 풀릴 때 보는 게 송길한 선생의 <짝코> 시나리오다. 얼마나 기본기나 구조가 중요한지 말해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오다가 시나리오 작가가 된 건 아니었다. 송길한 작가가 영화인이 된 건 운명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영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채플린 영화 보러 갔다가, 미성년자는 안 된다고 해서 부모님은 영화관에 들어가시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우선 나고….(웃음) 전쟁 끝나고 이강천 감독이 전주에서 <아리랑>(54) <피아골>(55) 같은 작품을 찍을 때 호기심으로 구경을 했는데,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 너무 재밌게들 일하고 열정도 대단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재미있을까 싶기도 했고….(웃음)”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수상한 세월 속에서, 그는 1학년 때 4.19 학생운동을 겪었고, 군에서 제대한 후 백수 시절에 별 생각 없이 <동아일보> 신춘 문예의 ‘시나리오 부문’에 응모했다. <흑조>라는 작품이었다. “시나리오 작법 같은 건 전혀 몰랐죠.” 이때 심사위원을 맡았던 극작가 오영진은 송길한 작가의 첫 스승이었다. “굉장히 좋게 평가해주셨어요. 수업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분의 도움으로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요.” 그러나 신춘 문예에서 당선되었다고 해서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충무로 제작자나 감독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설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죠.(웃음) 그러다가 어느 감독에게서 <흑조>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안 그래도 딸리는 역량으로 쓴 그 모자란 시나리오를, 더 대중적이고 쉽게 다운시켜서 다시 써 달라는 거예요.”

공모전을 통해 작가적 자질을 인정받긴 했지만, 송길한 작가는 이내 환멸을 느끼고 곧바로 영화계로 들어오지 않았다. ‘현업 작가’가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그때는 작가가 작품을 쓸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미 제작사의 기획이 있고, 누가 이렇게 하자고 그러면 그냥 했던 것이지,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쓰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최루성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나 액션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 ‘반공 영화’ 혹은 ‘국책 영화’라는 이름으로 충무로가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해야 했던 시대. 1970년대, 즉 송길한 작가의 30대는 그렇게 지나간다.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은 그의 작가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만남의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책 영화’였다. 당시 전방의 탱크 부대에서 폭발 사건이 있었는데, 어느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리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했던 것. 충무로의 한 제작사는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기획하면서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를 불렀다. “나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님도 당시까지 하던 작품으로부터 벗어나 변화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어요.”

이미 <족보>(79) <깃발 없는 기수>(80) 같은 영화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세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송길한 작가가, 이때 제안한 영화가 바로 <짝코>(80)였다. 짤막한 원안이 있긴 했지만, 송길한 작가의 창작이나 마찬가지였던 작품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의 이념 갈등 속에서 살아가던 두 남자의 엇갈린 인생을 그린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 안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던 작품.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자신들의 가족사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짝코> 작업은 그야말로 의기투합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념에 희생당한 인간’을 그린 이 영화는 대종상에서 반공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에 씌워진 ‘반공 영화’라는 이름은 누명이죠. 이데올로기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 파괴되는 허망한 세계는 어렸을 때 전쟁을 겪으면서 내 안에 축적되었던 것이고, 마찬가지였던 임권택 감독과 만나 <짝코>라는 영화로 나온 것이니까요.” 당시 <짝코>는 한 극장에서 편성에 차질이 생기자 임시 방편으로 6일 동안 상영한 것으로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 영화는 이후 재발견되었고 평론가들에 의해 1980년대의 중요한 한국영화로 재평가되었다.



이후 송길한 작가와 임권택 감독의 파트너십은 <씨받이>(87)까지 8작품 동안 계속된다. 1970년대 초부터 변화를 모색했던 임권택 감독의 노력은 1980년대 송길한 작가의 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셈이다. <짝코> 이후 그들이 두 번째로 함께 한 작품은 김성동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만다라>(81). 불교 교단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루었던 소설 <만다라>는, 영화에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두 젊은이가 자기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을 그린 것이죠. 그 길을 가는 두 승려의 ‘구도의 길’과 완성을 한 번 이야기하고 싶었고요.” 배경이 겨울이라 눈이 녹기 전에 촬영에 들어가야 했고, 갑자기 각색을 맡게 되어 어느 여관에 틀어박혀 4일 동안 한숨도 안 자고 썼던 <만다라> 시나리오. 이 작품 안엔, 그가 만들어냈던 수많은 캐릭터들 중 작가와 가장 닮은 사람이 있다. 바로 전무송이 역할을 맡았던 지산 스님이다.

“내가 그렇게 파격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틀에 갇히는 건 싫어해요. 지산처럼 술을 잘 마시기도 하고.(웃음) 나한텐 안티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순응하기보다는 일단 거부해놓고 확인하는 그런 성격, 그런 면에서 지산이라는 캐릭터가 좋았고, 선문답 같지만 의미가 꽉 차 있는 지산의 대사에 심취되어 있기도 했죠.”

영화 <만다라>(1981)의 한 장면

이후 그는 작가로서 승승장구한다. <만다라>로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의 시나리오 부문에서 수상했고, <우상의 눈물>(82) <안개마을>(83) <불의 딸>(83) 등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이 이어졌으며, 정진우 감독과 작업한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83)으로는 영평상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이나 제작자였던 이태원 대표만큼이나 송길한 작가에게도 큰 상처로 남은 작품이다.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비구니>는 <만다라>와 짝을 이루는 작품. <만다라>가 소승적 차원에서 개인의 고행을 담는다면, <비구니>는 한 여승이 전쟁을 겪으며 겪는 대승적 수행의 길을 그린다. 하지만 당시 불교 교단의 압력으로 제작이 중단되었고, 안타깝게도 촬영된 필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이 찍은 전쟁 신 중 <비구니>의 전쟁 장면이 압도적으로 잘 찍혔다고도 했죠. 그때 그 영화를 만들었던 열정을 생각하면, 만약 그 작품이 완성되어 칸영화제 같은 데 나갔다면, 세계적으로 한국영화의 수준을 알리는 데 10년은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사전 검열과, 개봉 전의 심의와, 종교 단체나 이익 집단의 외압이 창작자의 숨통을 조여오던 1980년대. 그 시절에 의식 있는 시나리오 작가로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이렇게 쓰고 그대로 찍어서 통과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엄청난 압박을 주었던 시절이죠. 뭘 쓰기 전에 겁부터 났고. 그러면서 우린,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게 아니라 우회하는 데 도가 트기 시작한 거예요.(웃음) 그런 데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티켓>(86) 같은 경우는 한 롤(15분 정도)이 삭제되기도 했어요. 반사회적이다 뭐다 해서. 한때는 정말 영화를 그만두려고도 했어요.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겠으니까. 예술가로서 수모라면 수모였을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참고 이겼던 게 저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송길한 작가의 시나리오는 철저히 현실에서 시작한다. 그의 동생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며 <넘버 3>(97) <세기말>(99)을 만든 영화감독인송능한은 이렇게 말한다. “형님이 늘 말씀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물들에겐 사람의 땀 냄새가 나야 하며, 그들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란 결국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또, 시나리오는 머리가 아니라 발로 써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신다.”

“(작업 방식을 말한다면) 생긴 대로 우직한 편이었어요.(웃음) 별로 영리하진 못했지만, 이상하게 책임감은 남 다른 편이었고. 주문을 받은 작품에 대해서는, 그 작품의 격이나 질이 어떻든 간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어요. 그건 순전히 역량 부족과 우직한 성격 탓이었던 것 같아요.” 송길한 작가의 시나리오가 지닌 힘은, 그런 우직함과 함께 ‘현장’에서 나온다. 영화는 허구일 수밖에 없지만, 임권택 감독이 말한 것처럼 송길한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는 “허구이되 우리 삶 안에, 생활 안에 늘 있는 내용”이다.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쓰는 것과, 그 작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등장하는 인물을 비슷하게라도 경험해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거든요. 그런 경험에서 얻어지는 아이디어가 실제 영화에서 표현되면, 그 이미지가 지니는 생명력은 대단해요. 그래서 저는 실제로 장소를 헌팅하지 않거나 인물을 만나 취재하지 않으면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어요.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부분은 강조해요. 직접 체험은 안 하더라도 접근은 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촬영 현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책상 앞에 앉아 썼던 것과 실제 현장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대사가 변할 수도 있고. 녹음실에서 대사 녹음이 끝날 때 비로소 시나리오가 끝난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보니까 그렇게 체질화되어 있더라고요.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상상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했던 것 같아요.”
철저한 현장성과 함께, 송길한 작가의 스타일에서 중요한 것은 플래시백 구조다. 좀 더 스피디한 진행 때문을 위해서인지 최근 한국영화에선 잘 사용하지 않지만, 송길한 작가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감정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짝코>나 <길소뜸>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일단은 30년 이상의 긴 세월을 담기 위한 방법이겠죠. 그 세월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선, 과거의 아팠던 기억들이 현재의 플롯과 복합적으로 잘 얽히게 하고, 그 기억이 현재의 이야기에 강한 추동력을 주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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