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배우 설경구 - 폭발적인 에너지





설경구의 얼굴은 밋밋하다. 그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에, 오디션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바로 “평범하다”였다. <오아시스>(02) 촬영 때만 해도 명색이 주연 배우인 그가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누가 배우고 누가 스태프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창동 감독은 그를 처음 봤을 때 “큰 귀 밖에 보이지 않았다”며 그를 설경‘귀’라 부르기도 했다. 귀가 커서 붙었던 설경귀라는 별명은, 이제 설경‘귀’(鬼)의 의미로 쓰인다. 그의 연기에는 무언가 독한 기운이 서려 있다. 그러나 ‘평범한 얼굴’을 가진 설경구의 비범한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은 의외로 일찍이 많았다. 그 중에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도 있었다. “너의 얼굴은 비어 있어서 좋다. 넌 거지부터 사장까지 다 할 수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격려를 설경구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아픈 시대를 관통한 <박하사탕>의 영호, 밑바닥 인생인 <오아시스>의 종두, 거대한 존재감의 레슬러 역도산, ‘꼴통’ 불량 형사 강철중 등을 거쳐 온 설경구는 언제나 캐릭터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밋밋한 얼굴을 가졌음에도 설경구는 결코 캐릭터에 묻히지 않았다.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면서도 설경구만의 존재감은 늘 스크린을 압도했다. 하지만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을 워낙 꺼리는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평가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 “이미지라는 건 다 편견에 불과해요. 배우의 이미지는 역할에 따라 결정되는 거죠. 영화에서 워낙 센 역을 많이 맡아서 강해 보이는 것이지 전 아직도 평범해요.” 밋밋한 얼굴 위로 여과 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 이것이 배우 설경구의 강점이자 본질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지만, 설경구에게는 이상하게도 연기에 대한 특별한 갈망이 없었다. 우리가 현재 설경구의 연기를 만날 수 있는 건, 수많은 ‘우연’들과 그의 숨겨진 재능을 귀신처럼 알아봐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출을 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갔어요. 누가 봐도 저는 배우를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숫기도 없었고 남 앞에 나서는 게 제일 싫었거든요.”

그런 그가 연기에 첫 발을 디딘 계기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연출 전공인 4학년 선배의 간택을 받아 난생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작품은 천승세의 <만선>이었다. 첫 무대 때 얼굴에 경련이 생길 만큼 긴장했지만, 상연이 끝날 때쯤 자신을 캐스팅 했던 선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네가 연출 공부하려고 이 학교에 온 것은 알지만 연기를 한 번 해 봐라.” 그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그는, 연극이 끝난 뒤 묘한 감정을 체험하게 되었다. 방학 내내 동기들과 의기투합해 만들었던 무대를 부수고 나니, 대책 없이 서럽고 쓸쓸한 감정이 밀려왔던 것. 이날의 알싸한 감정으로 그는 이끌리듯 연기로 전공을 바꾸었다.


4학년 2학기 때 ‘한양레퍼토리’ 소속의 연극배우가 된 그는, 연극 <심바새매>로 꽤 만족스러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안전한 둥지를 벗어나 과감히 ‘프리 선언’을 했다. “졸업해서까지 학교의 그늘에 있는 게 싫었다”는 게 이유였다지만, 무명인 그를 불러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용돈벌이를 위해 ‘우연히’ 극단 학전에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학전의 김민기 대표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조용히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김 대표의 눈에 띤 설경구는 “성실해 보인다”는 이유로 <지하철 1호선>에 캐스팅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은 곧 유명세를 탔고, 더불어 오디션 경쟁률도 치열해졌다. 설경구는 “지금 돌이켜 보니 무대 시절에는 언제나 운이 따랐던 것 같다”고 말한다.

평생 연극을 하며 살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 그는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꽃잎>(96) <처녀들의 저녁식사>(98) 등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쏠쏠한 아르바이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잠깐의 외도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연극배우가 영화를 병행한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충무로 감독들이 연극배우를 발굴하는 시절도 아니었고.” 그에게 영화 촬영장의 묘미를 알려준 첫 작품은 바로 박종원 감독의 <송어>(99)였다. “거의 모든 신을 삼척에서 찍었어요. 그전에 출연했던 영화들은 단역에 가까웠고, 잠깐 찍다 집에 가 버리니까 스태프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잖아요. 스태프들도 날 ‘저기요’라고 부르는데 당연히 정이 안 들죠.” <송어>에서 공연했던 강수연은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설경구를 회식 때마다 꼭 데리고 다니며 “반드시 될 배우”라고 스태프들에게 소개했다. 그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설경구는 “어차피 난 다시 연극으로 돌아갈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의 운명을 뒤흔든 영화, <박하사탕>을 만나기 전이었다.



    
“<송어>를 찍고 있을 때 이창동 감독님을 처음 만났어요.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며 대뜸 만나자고 하셨죠.” 삼척에서 영화를 찍다 잠시 서울에 머무를 때 그는 이창동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새 영화의 주인공을 물색 중인데, 스태프들이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고 설경구를 고려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이창동 감독은 “당신과 이 영화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은 투자가 되는 배우가 아니니까”라고 못 박았다. “시나리오나 읽어 보라고 하시길래 받아 들고 집에 왔죠.” 얼마 뒤 그는 신문에서 <박하사탕>의 주연과 조연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주연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접고 있을 무렵, <박하사탕>의 제작자 명계남으로부터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설경구는 얼떨결에 찾아간 오디션에서, 비닐하우스에서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신을 연기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스태프에게 빗이라도 달라고 해서 머리에 대고 연기했어요.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어요.”

영화<박하사탕>중

그러나 다음날 그는 “김영호 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환호보다 한숨이 앞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끌어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그는 <해피엔드>(99)의 내연남 역을 제의 받은 상황. 저울질을 했다. 아무래도 주연 배우들에게 ‘묻어갈 수 있는’ <해피엔드>가 나을 것 같았다. 이름도 없는 배우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명계남 제작자는 빨리 결정해 달라고 재촉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그는 “이 영화로 제대로 된 영화배우가 되어야겠다는 포부가 아니라, 이것만 하고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박하사탕>을 선택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설경구와 <박하사탕>의 인연은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이창동 감독이 그 많은 배우들 중에서 굳이 설경구를 주인공 역으로 지목한 이유도 재미있다. 이창동 감독은 “설경구의 얼굴이 밋밋하고 자신이 없어 보여서” 그를 선택했던 것. 다른 배우들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불안했다는 것이다. 설경구는 “이 영화는 내게 어떤 전설이나 신화처럼 특별하다”며 에피소드 몇 개를 꺼낸다.

“이창동 감독님이 집에서 오디션 영상을 체크하시다가 마침 제 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 옆을 지나가시던 사모님이 ‘얘가 김영호네’ 하시더래요. 소름이 끼쳤죠. 그리고 미술팀 스태프가 시나리오만 보고 상상해서 그린 김영호 얼굴이랑 제 얼굴이 똑같았어요.” <박하사탕>은 2000년 한국영화의 최고 수확이었다. 설경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김영호를 통해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는 <박하사탕>을 찍으며 “너무 힘들었고 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너무 속상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이런 감정을 이창동 감독이 몰랐을 리 없다. 감독은 어느 날 설경구에게 “현장에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있는데 그들 중 유일한 한 명이 날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버티고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너다”라는 진한 한마디를 던졌다. 설경구에게는 이 말이 “평생 잊지 못할 한 마디”의 가치로 다가왔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설경구에게 가장 중요한 영화는 “아직까지도 앞으로도 영원히 <박하사탕>”이다. “10년 이상 연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감각이 마모된 모양이에요. <박하사탕>을 통해 경험한 강렬한 감정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로 설경구는, 공공연하게 이창동 감독과 애증관계라며 말하곤 했다. 그리고 <박하사탕>은 설경구에게, 순임(문소리)이 영호에게 건네준 박하사탕처럼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영화인 셈이다.



설경구에게는 위험하게도(!)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이 없다. 곧 개봉을 앞둔 휴먼 재난영화 <해운대>는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고, 윤제균 감독의 사람 됨됨이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07)는, 감독의 전작인 <죽어도 좋아!>(02)를 보고 느낀 엄청난 감격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출연했다. 그리고 그는, 한 번 작업해서 신뢰가 쌓인 감독의 영화라면 두말 않고 출연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영화를 선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지만, 설경구는 “이 정도면 승률이 좋은 편 아니냐”며 씩 웃는다. “장르나 캐릭터의 다양성? 그런 기준으로는 작품을 결정하진 않아요. 그냥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 해요.” 그의 이런 작품 선택법은 “감독과 배우의 합”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그의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배우는 감독의 분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002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아무리 게거품을 물어도 배우가 20퍼센트밖에 못 보여 주면 20퍼센트 예술 한 것밖에 안된다. 배우는 그렇게 중요하고 또 멋있는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일견 허를 찌르는 부분이 있다. <박하사탕> 이후 그가 선택한 작품은 판타지 액션 블록버스터 <단적비연수>(00)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잘했다”와 “왜 하필 그 작품이냐.” 한쪽엔, 3년 정도 숨어 지내며 ‘<박하사탕>의 배우’로 남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가면 못 돌아올 것 같더라. <박하사탕> 비디오 들고 다니면서 ‘저 배우였어요’ 그러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진중하고 사회적인 시나리오도 많았는데, 한쪽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상업영화도 하고, 다음엔 멜로드라마도 해보고. 그냥 흘러가는 듯 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행보는 자유로웠다.

잔잔한 멜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01)에서 사람 좋은 은행원이 되어 ‘독한 놈’의 이미지에서 한 발 벗어났고, <공공의 적>(02)에선 강력계 형사 강철중이 되어 <박하사탕>의 무게감을 털어내며 대중적인 배우의 대열에 들어섰다. <박하사탕> 이후 언제나 꿈꿔왔던 이창동 감독과의 재회는 <오아시스>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뤘고, <광복절특사>(02)를 통해 정통 코미디에도 도전해봤다. 그리고 <실미도>(03)로 ‘천만 관객’ 시대를 연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사활을 걸고 덤볐던 <역도산>(04)의 참패는 그에게 쓰린 상처로 남아 있다. “역도산이라는 인물 자체가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도 인정 받지 못했던 인물이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잇따른 흥행 부진은 그에게는 어떤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사이에 <그놈 목소리>가 좋은 성적을 냈지만, <사랑을 놓치다>(06) <열혈남아>(06) <싸움>(07) 등이 연달아 부진했어요. 이 시기에 위축되었던 건 사실이에요.” 작년 <강철중: 공공의 적 1-1>(08)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시리즈라는 특수성 때문”이라며 스스로의 관객 동원력에 대해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그리고 그는 현재, <해운대>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설경구는 연기 외에 딱히 좋아하는 일이 없다. 변변한 취미 생활도 없다. 그가 연기를 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연기만큼은 질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연기 생활에도 위기는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연기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소리를 지르면 ‘<박하사탕>이다’, 울어도 ‘<박하사탕>이랑 똑같다’고 얘기하니까 화도 나고 불안했어요. 어떤 역을 맡아도 결국 설경구라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 사실 비슷할 수밖에 없잖아요. 한때는 목소리 톤이나 표정을 바꿔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럼 나 같지 않잖아요. 작위적인 건 싫었으니까요.”

설경구는 “시나리오에 이미 다 있는데 내가 무엇을 덧칠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차피 모든 캐릭터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히 그 인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 연기란 “감독이 원하는 인물에 얼마만큼 가깝게 접근하느냐”의 문제다. 유독 스스로의 연기에 점수가 박한 그는 “단 한 번도 만족스러웠던 연기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배우는 어떻게 보면 멍청한 직업이에요. 배우는 자기가 100퍼센트 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계속 하거든요.” 그는 “감독이 만든 인물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연기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상상 이상이다.


<역도산>의 송해성 감독은 “설경구가 웃으면 나도 기뻤고 그가 울면 나 역시 슬퍼졌다. 이렇게 현장에서 감정적이었던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나는 설경구의 연기에 푹 빠져 살았다”고 말한다. 이동진 기자는 “<공공의 적>에서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연기’를 하면서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설경구의 캐릭터 창조력에 대해 평하기도 한다.

많은 젊은 배우들이 닮고 싶은 배우 1순위로 지목하는 설경구의 연기 신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연기하지 말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연기란 “내 말을 하는 것, 포장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4년 내내 배운 것도 “말하라, 숨 쉬어라, 연기하지 마라”였다. “이창동 감독님이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같은 말을 하시더라고요. ‘연기하지 말아 주세요.’ 연기라는 게 별 게 아니에요. 그냥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거예요.”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을 배우로 살아 왔지만 그는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을 숨길 수 없다. 연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한없이 자책하며 침잠하기도 한다. 크랭크인 할 때는 여지없이 떨리고, 크랭크업 하면 눈물을 훔칠 정도로 아쉽다. “50년 넘게 연기한 70대의 대선배님도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리신대요. 연기란 게 참 즐겁지만 즐기긴 어려운 일이에요.” 그는 지난 10년의 연기 인생을 “그냥 왔다”고 담담히 정리한다. “100퍼센트 완성을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100을 향해 아등바등 별 짓 다하며 가고 있어요. 그 100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거예요.” 10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도 그는 “영원히 ‘진짜 배우’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여전히 그때의 불안과 열정을 품고 있는 설경구는 인터뷰를 마치고 묵묵히 차기작인 <용서는 없다>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남몰래 손에 땀을 쥐고, 촬영장 한 구석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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