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영화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한석규는 “당신은 다음 세기에 어떤 배우로 남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영화는 추억이에요. ‘1970년대에는 어떤 영화에 어떤 배우’라고 떠오르는 식으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1990년도부터 2000년 이후 몇 연도까지 한국영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들의 목록을 댈 때, 몇 연도 하면 ‘그때는 그 배우가 그런 작품에서 좋았지’라고 떠올릴 때 그게 저였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한 방법론에 입각하면, 1980년대가 안성기의 시대였다면 한석규의 화양연화는 1990년대, 좀 더 세분화하면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까지였다. 그 사이에 박중훈과 최민수와 문성근이 있었고, 한석규 이후엔 이른바 ‘빅 3’였던 최민식과 송강호와 설경구가 있다. 이 지형도에서 한석규는 조금은 이질적이다. 안성기가 시대의 요구에 호응하며 변하는 무채색이었다면, 박중훈과 최민수가 한층 밝고 강렬한 명도의 컬러였고, 문성근이 이전엔 없었던 새로운 색을 보여주었으며, ‘빅 3’는 관객의 시신경을 자극하는 원색이었다. 그렇다면 한석규에겐 한지의 탈색된 느낌이 있었고,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한석규의 감성은 과거 지향성에서” 나왔다.
이 시기 그의 영화에선 항상 어쩔 수 없는 가족과 오랜 친구와 옛 연인이 중요했다. 그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힘겨워하고, 엄연히 ‘가족의 일원’임이 강조되며, 과거의 사랑 때문에 현재를 저당 잡히고, 시한부의 삶을 살아갔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모습은 IMF 시대 한국인들의 처지와 겹쳤다. 스타덤에 오르려 야망을 불태우다 단명하는 배우와 달리, 한석규는 자연스레 다가와 조용히 관객의 마음을 훔치고 위로했다. 이러한 독특한 방식은, 그가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느리지만 꾸준히 걸었기에, 그다지 숨 차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던 한석규는 원래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기자의 꿈을 품었고(여기엔 둘째 형인 한선규의 역할이 컸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무대에 서며 연기의 맛을 알았고, 선배들의 칭찬 속에 자신감도 가졌으며, 2학년 땐 강변가요제에도 참가해 장려상을 수상했고, 제대 후엔 단편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그의 대학 생활은 나름 알찬 훈련 과정이었다. 1989년에 졸업을 하자 현실은 무섭게 달려들었다. 국립극단 오디션에도 떨어지고, 대학로의 극단에도 문을 두드렸지만 한 달 견디기가 힘들었다. 취직을 생각해봤지만 모두 낙방했다. 1년의 백수 생활 끝에 그는 KBS의 성우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신인 치고는 꽤 인정받았던 방송사 생활이었지만, 그는 목소리와 함께 몸으로도 연기하고 싶었다. 다음해 MBC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한석규. 만 27세였으니 나이 제한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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