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차승재 - 브랜드가 된 제작자

 



그런 면에서 1988년에 설립된 신철 대표의 ‘신씨네’는 한국영화에 ‘기획’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마련했고, 신씨네가 제작을 시작하면서 대기업 자본과 창투사 자본이 충무로로 유입되었다.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가 등장한 시기도 이때였고, 그들은 이른바 ‘프로듀서 1세대’로 지칭된다. 신철, 유인택, 안동규 등의 선배들을 거쳤던 차승재 대표는 저널이 지칭하는 ‘프로듀서 2세대’의 대표적인 제작자다. 1995년 우노필름을 설립했고, 2000년 싸이더스를 거쳐 2006년 싸이더스FNH 이후 현재까지, ‘제작 차승재’라는 레이블이 붙은 영화는 60여 편. 그러한 ‘다산성’ 속에서 그는 다양한 영화를 내놓았고, 그 규모와 스타일과 장르는 끊임없는 시도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어떤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겪었던 것에 비해, 젊은 시절의 차승재 대표는 ‘일반 관객’에 가까웠다. “영화야 뭐 남들 좋아하는 만큼 좋아했고…. 영화보다는 책을 좋아했어요. 정말 책은 나이에 비해 빨리, 그리고 엄청 읽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뿌리 깊은 나무>를 읽었으니까. <대화>라는 잡지도 기억이 나고. <현대문학> <문학사상> 같은 잡지도요. 그렇다고 ‘문학 소년’이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당시의 독서 습관은 이후 제작자가 되어서도 꾸준히 이어졌고, 그것은 그의 영화 인생을 지탱해준 소중한 자산인 셈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고, 졸업 후엔 의류업으로 꽤 많은 돈을 모으기도 했지만, 그의 삶 한 부분엔 영화가 있었다. 대학 시절 친구이자 영화아카데미 4기였던 김태균 감독(이후 싸이더스에서 <화산고>(01) <늑대의 유혹>(04) 연출)은, 차승재 대표를 영화계로 이끈 견인차 역할을 했다. 김태균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였던 이현승 감독(<시월애>(00) 연출), 김형구 촬영감독(<비트>(97) <무사>(01) <살인의 추억>(03) <역도산>(04) 등 촬영), 진영환 촬영감독(<늑대의 유혹> 촬영), 오석근 감독(차승재 대표가 기획했던 <101번째 프로포즈>(93) 연출) 등과 함께 차 대표의 카페를 찾곤 했고, 그는 자연스럽게 현장을 접하게 된다. “김태균 감독이 1989년쯤에 ‘영화공장’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거기 식구였죠. 그때 이명세 감독을 만났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90) 현장 일을 조금 돕기도 했어요. 그리고 옷 장사 할 때, 오석근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92)에선 일을 많이 했죠. 거의 제작부 일을 했으니까요.”

<걸어서 하늘까지>(92)에서 제작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제작 스태프가 된 그는, 당시 충무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제작자들과 한 편 한 편 작업하며, 조금씩 내공을 쌓아간다. “<걸어서 하늘까지>(92) 끝나고, 신철 대표의 신씨네에서 제작한 <미스터 맘마>(92)의 제작실장으로 갔죠. 다른 사람이 기획한 영화를 진행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기획한 영화를 해볼 것인가, 그런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이후 신씨네에서 <101번째 프로포즈>(93)로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94)을 통해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를, <너에게 나를 보낸다>(94)로는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를 만난다. “신철 대표에게선 ‘크리에이티브’나 기획에 대한 부분을 배웠다면, 안동규 대표에게선 추진력을, 유인택 대표에게선 실용적인 부분과 사람들 사이의 비즈니스를 배웠죠.” 이윽고 하산할 때. 그는 1995년에 우노필름을 만든다.



영화광도 아니었고, 영화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던 차승재 대표는 영화를 만들면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면서, 영화를 배웠다. 우노필름으로 비로소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게 된 차승재 대표. 하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건 아니었다. “제작부로 시작해 정점은 영화사를 차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노필름을 만든 거죠.” 창립작은 김상진 감독의 <돈을 갖고 튀어라>(95)였다. 첫 영화가 망하면 영화사가 없어질지도 모르기에 선택한 “아주 어려운 걸 해서 엉덩방아를 찢는 것보다는 무사히 안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였고, 꽤 괜찮은 흥행을 기록하며 이후 우노필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작은 기반이 된다. “그때만 해도, 지금까지 제작자로 살아남아 이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 줄은 몰랐죠.(웃음)”

차승재 대표의 책장에 쌓인 시나리오들

창립작부터 그렇듯, 차승재 대표는 유독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많이 제작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98)의 허진호 감독, <처녀들의 저녁식사>(98)의 임상수 감독, <유령>(99)의 민병천 감독, <킬리만자로>(00)의 오승욱 감독,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00)의 박흥식 감독, <플란다스의 개>(00)의 봉준호 감독, <지구를 지켜라!>(03)의 장준환 감독, <로드무비>(02)의 김인식 감독, <범죄의 재구성>(04)의 최동훈 감독, <남극일기>(05)의 임필성 감독, <연애의 목적>(05)의 한재림 감독 등이 모두 ‘제작자 차승재’를 통해 자신들의 첫 영화를 내놓을 수 있었다. “조금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그리고 당시엔 신인감독이 데뷔하는 게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그만큼 역량 있는 신인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들과 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고요.” 신인감독을 기용할 때 생기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사용했던 건 스타 시스템.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자신의 영화에 불러모은 건 아니었다. “약간은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많이 했거든요. 그럼에도 성공시켜야 했고요. 그래서 대중적 친숙함을 주기 위한 방책으로 스타 시스템을 많이 사용한 셈이죠.”



과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있긴 했지만, 한국영화계가 현대화된 1990년대 충무로에서 차승재 대표는 영화사를 꽤 규모 있는 기업의 형태로 만들려 했던 최초의 프로듀서다. 여기엔 두 가지의 현실적 문제가 수반된다. 물량과 자본. 많은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투자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과거에 영화 하던 사람들은, 영화 한 편 흥행하면 빌딩 하나 사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사업이라기보다는 장사에 가까웠던 거죠. 장사와 사업이 다른 건, 사업은 중장기적인 목표와 정체성이 있다는 거예요.” 일회성의 흥행을 넘어선, 좋은 제작 시스템으로 영화를 많이 만들 수 있는 회사. 최근 1~2년 싸이더스FNH이 조금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10년 넘게 그가 추구했던 부분이다. “제작자로서 돈을 벌고 싶다면, 시행 횟수가 많아야 하지 않겠어요? 2~3년에 한 편 만들어서 만약에 실패한다면, 이후 2~3년 동안 그 실패에 대한 자책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거죠. 하지만 1년에 세 편을 만든다면, 한 편 실패하더라도 3~4개월 후에 한 편 더 만들면 되는 거고요. 그래서 성공하면, 실패의 고통은 3~4개월에 끝나는 거죠.”

그가 생각했던 ‘규모의 영화경제학’ 이면엔 ‘사람’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영화 한 편이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배울 것이 굉장히 많은데,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다른 회사로 가버리는 거죠. 그러면 연속성이 없어요. 통계도 남지 않고, 노하우도 축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작 인력을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같은 회사에 모인 사람들이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면서, 그 안에서 갈등하고 토론하면서 지향점을 맞춰가는 것. 그가 실천했던, 그리고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이다.


하지만 여기엔 자본이 필요했고, 어쩌면 그의 ‘제작자 인생’은 끊임없이 안정적인 기반을 찾아다녔던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노필름을 만든 지 14년, 네다섯 번의 커다란 ‘자본 변화’가 있었고 그때마다 회사 이름도 바뀌었다. “프로듀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일종의 생명 유지 활동 같은 것?(웃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저널에선 ‘차승재 표 영화’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에서 감지되는, 기존 상업영화와 조금은 다른 그 무엇은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이 아닌 제작자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세우게 한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정 정도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고, 영화에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를 조금 더 담으려 노력했던 건 사실이죠. 꽤 괜찮은 영화로 관객들과 승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요. 운 좋게 몇 편이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영화들이 새로워 보였던 거고.”



제작의 규모에 대한 고민과 함께, 해외 시장에 대한 부분도 차승재 대표가 품었던 화두 중 하나였다. 2000년 이후 그가 제작한 몇 편의 영화에선 ‘내수용’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강하게 엿보인다. “한국에서 영화를 하지만, 극장의 개봉 상황은 글로벌한 거죠. 한국 시장 안에서 세계 영화와 경쟁하는 셈인데…. 사실 한국영화 시장이 전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해요. 하지만 그걸 바꿔서 공격적으로 생각해보면, 개척해야 할 너무 큰 시장이 밖에 있다는 거죠.” 한국영화가 장기적으로 가려면 해외 시장으로 수평적 확산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한국 시장과 가장 유사하다고 판단한 일본 시장과의 친밀감을 높이려 했고, <봄날은 간다>(01)는 한국과 일본과 홍콩이 4:4:2의 비율로 자본을 대고, 각국에서 개봉했던 영화다. <무사>(00)나 <화산고>(00)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한 프로젝트들이었다.

해외 시장과 함께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극장 개봉용 영화’의 틀에서 좀 더 확장된 종합적 콘텐츠였다. 2000년 매니지먼트 업체와 결합해 우노필름에서 싸이더스로 변화를 추구한 건 그런 이유였다. “외국의 ‘영화 선진국’들에겐 모두 수직 계열화된 스튜디오 시스템의 역사가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영화산업에선 프로덕션이 지리멸렬한 상태였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새로운 자본을 결합시키면 한국영화를 활성화할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그래서 신씨네, 우노필름, 명필름을 합쳐 ‘SUM’ 프로젝트를 만들었는데, 영화사들의 결합이라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종류가 다른 소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건 어떨까 생각했고, 싸이더스를 만들게 된 거죠.”



현재 차승재 대표는 영화과 교수로서, 영화제작자협회(이하 제협) 회장으로서 영화제작과 조금 거리가 있는 일들도 겸하고 있다. 특히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4년 남짓한 시간은, 영화제작만큼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좋은 영화를 제작했을 때 보람이 있겠지만, 그건 영화이지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화는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삶의 종속물일 뿐인 거죠. 그런데 제가 지도한 학생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훌륭한 제자로서 성장해 나갈 땐, 500만 명 이상 흥행한 영화를 만든 것보다 큰 기쁨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영화를 이끌어나갈 거고요. 제자도 작품인 것 같아요.”

교육에 대한 부분이 희망한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면, 제협 회장으로서의 일은 제자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현실적 작업이다. 그는 제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영화 노조, 불법 다운로드, 제작 활성화 등 첨예한 현안들과 씨름했다. 게다가 호되게 불어온 경제 한파는 그의 어깨를 좀 더 무겁게 했다. “관객들이 조금은 고운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영화 요금이 2001년 이후 제자리거든요? 어느 정도는 요금이 올라야 산업 전체의 매출 구조가 정상화된다고 봐요. 그리고 예전엔 50퍼센트까지 차지했던 부가판권 시장이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사라졌어요. 쉽고 빠르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 보면 영화가 생산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소비자가 조금 더 비용 부담을 하시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한국영화를 볼 수 있는 구조가 생겨야 할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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