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시절의 이태원 대표에겐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자연스레 길거리 생활을 하며 ‘하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승만 정권 시절, 명동 거리는 여러 ‘조직’들이 대립하는 전쟁터였고 그 한 구석에 그가 있었다. 그 시절 수많은 위험한 일들을 겪고 거친 세상과 부대끼면서, 그는 세상을 배운다. 그리고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도 그때였다. 1959년, 이태원 대표는 이른바 ‘행동대원’이었고, 나이트클럽의 속칭 ‘기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만난 어느 무역업자는 이태원 대표에게 영화 제작을 권유했다. 영화 한 편 제작비가 1천만 원 정도였던 시절. 그렇게 그의 첫 영화인 <유정천리>가 탄생했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던 ‘정치 깡패’ 임화수의 영화에 밀려 추석 개봉에 실패했고, 그는 큰 빚을 지게 되었으며 믿던 사람에게 사기까지 당하게 된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악극단을 조직해 전국 공연에 나섰지만, 더 큰 손실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영화’와의 쓰디쓴 첫 인연. “충무로 쪽은 돌아보기도 싫었다”고 회상하는 그때 이후 15년 가까이 그는 ‘영화’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군납업체 관련 일과 건설업으로 20~30대를 보낸다. 1970년엔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을 정도로 꽤 건실한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할 ‘팔자’였던 듯, 1974년에 부도가 난 친구의 상가를 인수하면서 우연히 극장 사업과 배급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인수한 의정부의 상가엔 중앙극장이 있었는데, 입지 조건이나 시설이 괜찮았음에도 별로 손님이 들지 않았던 것. 당시 영화 배급은 지역별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경기와 강원 지역 배급업자들이 중앙극장엔 괜찮은 영화를 공급해주지 않았기에 재개봉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20개의 영화사만 영화제작과 외화 수입을 할 수 있었던 시절. 그는 영화사를 모두 찾아다니며 웃돈을 주고 라인업을 확보했고, 결국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그리고 1983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를 세운 그는 <유정천리> 이후 20여 년 만에 다시 영화제작자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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