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이태원 - 한국영화계의 기둥

 




지금은 극장업에 전념하며 영화제작을 떠나 있지만,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 이태원 대표는 한국영화의 어른이자 한편으로는 청년이었다. 그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부친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굵직한 자산이고, 특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제작자 이태원’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이태원 대표는 <만다라>(81)를 보고 임권택 감독과 함께하겠다고 결심했고,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을 <비구니>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군사정권과 불교계 사이의 갈등 속에서 완성되지 못했고, 그들은 <아제아제 바라아제>(89)에 이르러서야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이후 <하류인생>까지 15년 동안, 임권택 감독의 12편 중 <개벽>(91)을 제외한 11편이 ‘태흥영화사’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태원 씨는 내가 하자고 한 것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어요. 무엇을 하자고 하면, 그래, 하자였지. 그 다음에 일체의 간섭이 없는 거요.” 제작비와 흥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제작자라는 위치. 그러나 ‘영화제작자 이태원’에겐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그에겐 거친 세월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아온 자의 추진력과 함께, 감상적이며 인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태원 대표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지주였고 정미소와 양조장을 경영하던 그의 집안은, 해방을 맞이해 서울로 내려온다.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지주 가문이 겪을 고초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부산에서 재회한다. 방 하나에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이 살아야 했던 시절. 열여섯 살의 이태원은 홀로 거리를 결심하고, 집을 나와 부둣가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된다. 미군의 군수품에서 빼돌린 물건들을 국제시장 좌판에서 팔기 시작한 것. 수입은 의외로 짭짤했고, 이후 인생에서 알 수 있듯 타고난 사업가 기질은 이미 전쟁통에서 싹 텄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태원 대표의 방랑은 조금은 복잡했던 집안 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부잣집일 경우 축첩 제도가 일반적이었던 시절, 그의 생모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고, 그는 ‘큰어머니’ 밑에서 눈칫밥을 먹는 것이 괴로웠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전쟁이 끝난 후엔 잠시 기거했던 형의 집을 떠나 친구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기도 지역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이른바 ‘장돌뱅이’가 된다.

그의 돈 버는 재주는 장돌뱅이 시절에도 여전했다. 처음엔 심부름 수준이었지만, 서울의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 경기도 지역의 소매상에 넘기는 일을 하면서, 그의 주머니는 점점 두꺼워졌다. 2005년에 <중앙일보>에 연재한 자전 스토리인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에서 이태원 대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한테 이런 장사 수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벌이가 좋았다. 당시 서울 신설동의 10여 평짜리 집값이 1만여 원 했는데, 장사한지 약 여섯 달 만에 그런 집을 서너 채 살 돈을 모았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스스로 3년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한 그는 배재고등학교에 들어가 축구부로 활동했고, 이후 동북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되어 나름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동북고는 이회택이나 홍명보 같은 선수를 배출한 축구 명문. 이후 신흥대(현 경희대) 축구부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문제는 수업료를 낼 돈이 없었다. 그때 조금만 상황이 괜찮았다면, 이태원 대표는 국가대표를 거쳐 프로축구 팀 사령탑을 거친 후 지금은 원로 축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 - 씨네21



스무 살 시절의 이태원 대표에겐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자연스레 길거리 생활을 하며 ‘하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승만 정권 시절, 명동 거리는 여러 ‘조직’들이 대립하는 전쟁터였고 그 한 구석에 그가 있었다. 그 시절 수많은 위험한 일들을 겪고 거친 세상과 부대끼면서, 그는 세상을 배운다. 그리고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도 그때였다. 1959년, 이태원 대표는 이른바 ‘행동대원’이었고, 나이트클럽의 속칭 ‘기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만난 어느 무역업자는 이태원 대표에게 영화 제작을 권유했다. 영화 한 편 제작비가 1천만 원 정도였던 시절. 그렇게 그의 첫 영화인 <유정천리>가 탄생했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던 ‘정치 깡패’ 임화수의 영화에 밀려 추석 개봉에 실패했고, 그는 큰 빚을 지게 되었으며 믿던 사람에게 사기까지 당하게 된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악극단을 조직해 전국 공연에 나섰지만, 더 큰 손실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영화’와의 쓰디쓴 첫 인연. “충무로 쪽은 돌아보기도 싫었다”고 회상하는 그때 이후 15년 가까이 그는 ‘영화’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군납업체 관련 일과 건설업으로 20~30대를 보낸다. 1970년엔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을 정도로 꽤 건실한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할 ‘팔자’였던 듯, 1974년에 부도가 난 친구의 상가를 인수하면서 우연히 극장 사업과 배급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인수한 의정부의 상가엔 중앙극장이 있었는데, 입지 조건이나 시설이 괜찮았음에도 별로 손님이 들지 않았던 것. 당시 영화 배급은 지역별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경기와 강원 지역 배급업자들이 중앙극장엔 괜찮은 영화를 공급해주지 않았기에 재개봉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20개의 영화사만 영화제작과 외화 수입을 할 수 있었던 시절. 그는 영화사를 모두 찾아다니며 웃돈을 주고 라인업을 확보했고, 결국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그리고 1983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를 세운 그는 <유정천리> 이후 20여 년 만에 다시 영화제작자가 된다.



그는 “돈 되는 일보다는 ‘폼’ 나는 일이 더 하고 싶어서”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고 말하지만, 창립작품부터 예상치 못했던 커다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맡았으며, 송길한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비구니>. 주연은 당대 최고의 관록파 배우 김지미였다. <만다라>가 소승적 입장에서 접근했다면 <비구니>는 대승적 입장에서 전쟁 전후의 한국사를 조망하는 대작. 이미 대규모 전쟁 신은 모두 촬영한 상태에서 일이 터졌다. 불교계는 거세게 반발했고, 이태원 대표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비구니>를 빌미로 군부 정권의 불교 탄압을 돌파하려 했던 불교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는 2억5천만 원이라는, 당시로선 영화 두 편을 만들 수 있었던 거금을 깨끗이 포기해야 했다.

태흥영화사 창립작품 영화 <바구니> 제작발표회. 
배우 김지미(좌) 이태원 대표(우)

<무릎과 무릎 사이>(84)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들어간 이태원 사장의 ‘제작 철학’은 확고했다. 그는 긴 세월 동안 각종 사업과 영화 배급과 극장업으로 축적한 자본을 그대로 영화제작에 투자했다. “자기 돈으로 제작해야 진짜 제작자”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개런티나 제작비에 있어서 매우 후한 편이었다. <어우동>(85)의 제작비 1억8천만 원은 당대의 파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력 있는 감독을 고집했고,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이장호 이두용 배창호 등 당대의 흥행사들이 모두 이태원 대표와 손을 잡았다.

그는 영화제작이 리스크가 큰 사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몸을 사리기보다는 과감하게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다. 기존의 흥행 데이터보다는 감독의 능력을 믿었고, 계산보다는 어떤 ‘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영화는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 모호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감’입니다. 현장을 알고, 관객을 알고, 영화인을 알고, 오랜 기간 동안 영화를 제작하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감’이죠.”

그가 이규형 같은 젊은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기고,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91) 같은 영화를 선뜻 제작할 수 있었던 건, 주판알을 튕기기보다는 사람과 경험과 느낌을 신뢰했던 스타일의 결과일 것이다. 한편 이태원 대표는 자신의 ‘감’이 틀리는 실수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87)은 대표적인 예다.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뽕>(85) 등 일련의 에로티시즘 영화에서 큰 흥행을 기록한 이태원 대표에게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순애보는 너무 밋밋해보였다. 하지만 배창호 감독에겐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영화는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영화에 대해 참 많이 배웠다. 영화는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애정물이든 액션이든 코미디든 감독이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로구나. 남이 안 하는 장르, 남이 시도하지 않은 이야기도 과감히 할 필요가 있구나.”



<비구니> 때 이루지 못했던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은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드디어 꽃 핀다. 이후 ‘감독 임권택’과 ‘촬영감독 정일성’과 ‘제작자 이태원’은 한국영화를 지키는 상징적 이름이 되었고, 15년 동안 팀 워크를 이룬다.

첫 쾌거는 <장군의 아들>(90)이었다. 이 영화는 제작자 이태원이 감독들의 든든한 지원자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영민한 기획 감각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액션 영화 연출을 망설이던 임권택 감독에게 소설 <장군의 아들>을 권한 그는, 전원 신인으로 영화를 만들자는 임권택 감독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서울 관객 68만 명을 기록하며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77)가 세운 흥행 기록을 13년 만에 갱신했다. 연 이은 두 편의 속편도 모두 흥행하며 신드롬을 기록했고, 박상민은 스타덤에 올랐으며 임권택 감독은 흥행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태원 사장에게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영화다. “결국 임권택 감독은 4년 8개월 동안 <장군의 아들>에 매달려야 했던 거죠. 그 시간만큼 칸영화제를 향한 꿈은 미뤄진 거고요.”

임권택 감독, 이태원 대표, 정일성 촬영감독(좌로부터)

그렇다면 <서편제>(93)은 임권택 감독에 대한 선물 같은 영화였다. <태백산맥>의 판권을 구입해 영화화를 계획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묶여 있던 시기, 이태원 대표는 임권택 감독에게 “흥행엔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영화 있으면 해보라”며 용기를 북돋웠고, 임권택 감독은 10여 년 전에 읽었다며 누렇게 변한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이청준 작가의 원작엔 전율이 흐르는 감동이 있었고,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판소리’를 소재로, 단 한 명의 스타도 없이 여주인공은 신인을 기용한 영화 <서편제>. 이태원 대표는 이 영화로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을 3개월 만에 갈아치우고, ‘서울 관객 1백만 명’이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스코어를 돌파한다.



<서편제>를 계기로 ‘레드카펫’에 대한 이태원 대표의 열망은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명예욕은 아니었다. <취화선>(02)으로 임권택 감독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한 지 18년이 됐고, 칸의 레드카펫을 밟겠다고 생각한 지 9년 됐어요. 하지만 꼭 상을 타겠다는 건 아니에요. 상 타면 좋죠. 하지만 상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이태원 대표에게 ‘칸의 레드 카펫’은 어떤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소박한 인정일 수도 있고, 한국영화의 어른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책임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춘향뎐>(00)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시사를 마쳤을 때, 전세계에서 모인 1천여 명의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을 때, 그는 “마약 주사라도 맞은 듯”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자신의 ‘영화 친구’들인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트로피를 높이 치켜들 수 있었다.

“이제는 서로 마음도 잘 알고, 우리끼리 아니면 누가 같이 영화 하자고 할까 싶기도 해요. 우리가 <취화선> 찍기 위해 한옥 마을 세트를 지었잖아요. 어느 날 세트를 둘러보고 오는 데, 정일성 촬영감독이 눈물을 흘려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고. 우리, 아직 그래요. 좋은 영화 만들고 싶어서 이거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99번째 영화에서 다시 모인다. <하류인생>. 영화제작자 이태원의 삶이 오롯이 담긴 그 영화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부터 15년 동안 곁에 있어 주었던 친구에 대한 임권택 감독의 작은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태원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축하하는 자리엔 함께 하지 못했다. <천년학> 제작을 돌연 포기했던 것. 이후 영화는 난항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고, 영화계에선 충무로의 두 어른의 결별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섭섭함은 없냐는 질문에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어찌 보면 만날 임권택이 하자는 대로 했잖나. <장군의 아들> 빼놓고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한 게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신날 리도 없고. 그러니 다 이해하고, 원망할 여지가 없다.” 평소 말버릇처럼 “나는 장사꾼”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편제> 같은 영화를 한 편 더 만들고 싶다”고 말하던 이태원 대표. 지금은 잠시 영화제작을 떠나 있지만, 그가 다시 뚝심 있는 제작자로 현장에 돌아올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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