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성 촬영감독의 인생은 격렬한 역사의 변동 속에서 진동했다. 스스로 “불우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겪은 시간의 희로애락을 영상에 투영했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과 분단, 전쟁과 쿠데타, 군사 독재와 광주 민주화 항쟁 같은 ‘사건’들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그렇게 쌓인 내공은 그만의 이미지와 미학으로 영화를 통해 드러났다.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그는 17세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그는 6개월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가나다라’부터 익혔고, 한국 역사에 대한 책들을 독파해나갔다. 이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 후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전공을 살릴 만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결국 그는 미 공보원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공군 홍보영화를 통해 영화를 접한다. “대구에 출장을 갔는데 당시 정훈감실 소령이었던 학교 선배가 같이 영화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땐 당연히 평생의 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죠. 영화도 몰랐고. 그런데 하다 보니 매력도 느끼고 주저앉게 되어서, 지금까지 50년 넘게 하게 됐네요.(웃음)”
이후 당시 최고의 촬영기사로 꼽히던 김학성 밑에서 조수 생활을 거친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첫 영화는 조긍하 감독의 <지상의 비극>(57). 그렇게 데뷔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수행 기간이 필요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그는 잠시 카메라를 놓았다. “당시 충무로엔 날림으로 만든, 홍콩영화의 아류작들이 설치던 시절이었죠. 억지로 하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도저히 그런 영화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못 찍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으로 갔죠. 아시아문화재단을 통해 연수를 갈 수 있었거든요.”
그는 일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붉은 수염> 촬영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름 탄탄히 준비해 구로사와 감독에게 어필했고, 구로사와 감독은 그에게 세 대의 카메라 중 B카메라를 맡겼다. 과거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에서의 1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보는 개안, 또 국제적으로 영화를 보는 개안, 영화를 왜 만드는지에 대한 큰 틀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나를 지탱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잠시 카메라를 놓았던 시기는 독학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김기영 감독과 자주 만나며 아이디어를 나누었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으며, <남과 여>(66) 같은 영화는 ‘쇼트 바이 쇼트’로 꼼꼼히 분석하며 새로운 영상 기법을 기록했다. “어차피 나는 굉장한 부자는 될 수 없을 테니까, 가난하더라도 어떤 ‘정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날림 영화들을 찍었다고 해서 내가 부자가 되었을까요? 아마 돈도 못 벌고 평가도 못 받았을 거예요.(웃음)”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