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촬영감독 정일성 - 외눈박이 영상시인

 




정일성 촬영감독의 인생은 격렬한 역사의 변동 속에서 진동했다. 스스로 “불우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겪은 시간의 희로애락을 영상에 투영했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과 분단, 전쟁과 쿠데타, 군사 독재와 광주 민주화 항쟁 같은 ‘사건’들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그렇게 쌓인 내공은 그만의 이미지와 미학으로 영화를 통해 드러났다.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그는 17세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그는 6개월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가나다라’부터 익혔고, 한국 역사에 대한 책들을 독파해나갔다. 이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 후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전공을 살릴 만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결국 그는 미 공보원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공군 홍보영화를 통해 영화를 접한다. “대구에 출장을 갔는데 당시 정훈감실 소령이었던 학교 선배가 같이 영화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땐 당연히 평생의 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죠. 영화도 몰랐고. 그런데 하다 보니 매력도 느끼고 주저앉게 되어서, 지금까지 50년 넘게 하게 됐네요.(웃음)”

이후 당시 최고의 촬영기사로 꼽히던 김학성 밑에서 조수 생활을 거친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첫 영화는 조긍하 감독의 <지상의 비극>(57). 그렇게 데뷔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수행 기간이 필요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그는 잠시 카메라를 놓았다. “당시 충무로엔 날림으로 만든, 홍콩영화의 아류작들이 설치던 시절이었죠. 억지로 하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도저히 그런 영화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못 찍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으로 갔죠. 아시아문화재단을 통해 연수를 갈 수 있었거든요.”

그는 일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붉은 수염> 촬영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름 탄탄히 준비해 구로사와 감독에게 어필했고, 구로사와 감독은 그에게 세 대의 카메라 중 B카메라를 맡겼다. 과거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에서의 1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보는 개안, 또 국제적으로 영화를 보는 개안, 영화를 왜 만드는지에 대한 큰 틀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나를 지탱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잠시 카메라를 놓았던 시기는 독학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김기영 감독과 자주 만나며 아이디어를 나누었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으며, <남과 여>(66) 같은 영화는 ‘쇼트 바이 쇼트’로 꼼꼼히 분석하며 새로운 영상 기법을 기록했다. “어차피 나는 굉장한 부자는 될 수 없을 테니까, 가난하더라도 어떤 ‘정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날림 영화들을 찍었다고 해서 내가 부자가 되었을까요? 아마 돈도 못 벌고 평가도 못 받았을 거예요.(웃음)”



정일성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계기는 김기영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특히 <화녀>(71)는 그에게 무척 중요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색채 미학은 거의 10년은 앞선 시도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카메라 외에 제작부 일까지 도우며 김기영 감독과 함께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이연호가 지은 김기영 감독에 대한 저서 <전설의 낙인>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화녀>를 찍을 때 김기영 감독은 몇 개월이 걸리더라도 최고의 컬러를 내달라고 했다. (중략) 낮엔 테스트를 하고 밤엔 현상해서 그 다음날 김기영 감독과 색을 분석하면서 캐릭터와 색 심리학을 연결시켰다. 여주인공이 어떤 색의 옷을 입을 때 어떤 심리인가. 그렇게 색깔이 결정되면 둘이서 세트장으로 가서 밤새도록 응접실 등의 배경 색을 직접 칠했다.”


<화녀>에서 파격적인 색채와 앵글의 실험을 했던 정일성 촬영감독은 김기영 감독과 <파계>(74) <이어도>(77) 등을 이어가며 영상 작가로서 점점 성숙해져간다. 체제와 반체제와의 투쟁이라는 테마를 불교 영화의 형식 속에 담아낸 <파계>에선 신비감이 감도는 화면을 만들어냈고, 제주도에서 3개월 동안 로케이션 촬영을 했던 <이어도>에선 일반적으로 쓰는 코닥 필름이 아닌 아그파 필름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시도했다. 이 시기 김기영 감독과 함께 그의 파트너였던 감독을 꼽는다면 유현목 감독과 김수용 감독이다. 유현목  감독은 관념의 세계를 영화 속에 그대로 형상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에겐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모더니즘적인 스타일로 매끈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김수용  감독과의 작업도 다른 맛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과 만나기 전, 그는 김기영-유현목-김수용 감독 사이를 오가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가곤 했다.

그리고 1979년, <신궁>이라는 샤머니즘 영화로 그는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임권택 감독과 처음 할 뻔했던 영화는 <추적의 휘날레>라는 영화였어요. 그때 내가 태창영화사에서 촬영 한 편을 하기로 했는데, 감독이 누구냐고 그랬더니 임권택 감독이라고 하더라고요. 전부터 사람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새로운 감독과 작업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내심 기대했죠.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그 영화를 못하게 했어요. 1977년쯤이었나? 대신 <신궁>이라는 영화를 찍게 된 거죠.”

이후 정일성 촬영감독은 임권택 감독이 1980년대에 내놓은 16편 중 7편의, 1990년대에 내놓은 8편 중 6편의, 2000년대에 내놓은 4편 모두의 카메라를 잡게 된다. 정일성 촬영감독과 만났던 1970년대 말 임권택 감독은 일종의 전환기를 겪고 있었고, 정일성 감독과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감독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만다라>(81)였다. “<신궁> 끝나고 한 달 동안 임 감독과 함께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서로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요. 그때 임 감독이 ‘다음에 어떤 영화를 할진 몰라도 꼭 정 형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때 제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때였어요. 그런데 임 감독과 <신궁>을 해보고 나니, 이 사람이 굉장히 ‘진국’인 거라! 그런 임 감독이 나를 원하고 있었던 거죠. 당시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감독 등이 ‘베스트’였는데, 임 감독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생각했어요, 나중에 <만다라> 끝내고 나니까, 세 감독이 모두들 질투를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접어들던 시기, 정일성 촬영감독은 생사를 오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77년 변장호 감독의 <을화>를 찍을 때였다. 촬영을 위해 강릉으로 가던 교통사고를 겪었다. 한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만 살아남은 큰 사고였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12월31일까지는 촬영을 끝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사고를 당했는데 이상하게 외상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급박한 일정이라 그 길로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촬영을 강행했죠. 겨울 바다 장면을 찍기 위해 차가운 물 속에 4시간을 있었고, 촬영 마치고 나와서 쓰러졌어요.” 사고를 당하며 내장이 꼬인 상태에서 차가운 물 속에 오래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0시간에 걸쳐 장을 세 토막 내 플라스틱으로 연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계속 현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현장에서 더 큰 일이 터졌다. “난 그냥 과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직장암이었어요. 집에서는 장례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나한테는 정확히 얘기를 안 하고 수술을 시작했는데, 엄청나게 긴 수술이었어요. 회복실에 3일이나 있었을 거예요.” 75킬로그램이던 체중은 41킬로그램으로 줄어 있었고, 그는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면회를 왔는데, 병원 생긴 이후에 그렇게 많이 면회를 온 경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회복된 후에 좋은 영화로 보답하는 길 밖엔 없겠다고 느꼈어요.” 이때 임권택 감독이 병원을 찾아와, <만다라>를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만다라> 원작을 읽고 나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들 때문에 너무나 일이 하고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정일성 촬영감독은 병원에서 죽기살기로 운동을 했다.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어떨 때는 탈진해서 쓰러지기도 했다. 결국은 붕대를 풀기도 전에 임권택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함께 헌팅을 떠나자고 말했다. “30년 가까이 한 명의 영화감독과 한 명의 촬영감독이 같이 일한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내가 임 감독을 신뢰했기에 가능했겠죠.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점도 나와 잘 맞았고. 물론 임 감독도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겠죠. 저도 그렇고. 하지만 인연인 거죠. 붕대 감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와서 함께 영화를 하자고 제안해줬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안도감을 준 것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고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한다>에서, 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을 찾아가 ‘쾌차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까지 하며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하려 했냐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질문에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전략) <신궁>에서 몇 커트를 보고 아, 이런 부분이 뛰어난 데가 있구나 하는 것이 점검된 데가 있다고. 그 뛰어난 부분을 해낼 수 있는 촬영기사, 그렇게 생각한 거죠. 이제까지 일한 사람들보다는 이 기사가, 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동안에 해왔던 기사들보다는 제일 낫다고 보였으니까. 나로서는.” 당시까지 ‘촬영기사’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던 충무로. 임권택 감독은 <만다라>에서 최초로 ‘촬영감독 정일성’이라고 자막을 넣으며, 40킬로그램도 안 되는 체중으로 붕대를 감고 현장을 지켜준 동료의 열정에 보답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1970년대 초에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리만 과 만났다. 그때 베리만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구든지 잡을 수 있는 앵글을 잡아라. 하지만 누구든지 네 앵글을 흉내 내려면 고도의 계산 없이는 잡을 수 없는 앵글을 잡아라. 완벽한 앵글을 잡은 다음에 그것을 일관된 계산에 의해 흩트려라. 그것이 프로가 하는 일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베리만의 이 말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던 영화가 바로 <만다라>였다. 이 영화의 길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당시 한국영화에선 만나기 힘든 미장센의 미학을 지니고 있었다. 인물들은 화면의 사이드에 존재하고, 영화의 공간 감각은 흩트려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철저한 계산 속에 있다. “관객들에게 그 공간을 ‘읽히게’ 만들고 싶었던 거죠. 공간 안에서 보이지 않은 까만 부분엔 무엇이 있을까…. 그곳에는 희망도 있고 참담한 좌절도 있겠죠. 그래서 인물을 거의 센터에 잡지 않고, 사이드에 잡으며 장면을 연결해간 거고요.”

그리고 <만다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색채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흑백영화처럼 느껴지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색감이다.  “<만다라> 크랭크인 하는 날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이었죠. 뉴스를 들으면서 어떤 분노 같은 게 솟구쳤어요. <만다라>는 아름답게 찍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수묵화처럼 암울하고 찍고 싶었어요. 우리의 현실이 처해 있는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색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내가 찍은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화면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요. 우리의 역사와 삶이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프게 찍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거죠.” 그런 맥락일까? <서편제 >(93)의 원작자인 소설가 이청준은 “미학엔 아름다운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서편제>의 영상을 보고 아픔이 지닌 척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1990년대부터 정일성 촬영감독은 <축제>(96)와 <창>(97)을 제외한,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에서 카메라를 잡았다. <장군의 아들 >(90)의 액션 한 커트 한 커트를 찍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도를 했고, <개벽>(92)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된 임권택 감독의 ‘인본주의’는 그의 카메라로 완성되었다. <서편제>에서 ‘진도 아리랑’이 흐르던 5분40초짜리 롱 테이크는 그의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명장면이다. <춘향뎐>(00) <취화선>(02) <천년학>(07)으로 이어지는 영상 미학은, 정일성 촬영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경지였다.




50년이 넘는 영화 인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연출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촬영감독은 감독이 하지 못하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촬영감독이 감독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촬영감독은 렌즈, 앵글, 구도 등에 대해 꾸준히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인 거죠. 그래서 그 감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게 만드는 거고요. 그런 부분이 뿌듯했기에 지금까지 왔어요. 촬영감독과 감독은 동등한 위치인 거죠.” 150편에 가까운 작품의 현장에서 뷰파인더를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영화 인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은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일에 쫓겨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며 지내는 요즘. 그는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를 기다리고 있으며 여전히 건강하다. “저는 그저 일을 부탁하는 사람이 감사한 거죠. 임 감독이 없었다면, 파고다 공원에서 한숨이나 짓고 있어야 할 나이인데 말이죠.(웃음)”

누군가가 붙인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라는 별명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보인다. 이것은 그가 긴 세월 동안 터득한 나름의 철학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사람은 두 눈으로 보고 느끼지만, 뷰파인더에 눈을 댈 때는 두 눈으로 본 걸 한 눈으로 압축시켜야 하죠. 그러기에 촬영감독은 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외눈박이 인생인 셈이죠. 사진이 이미지를 잘라내는 트리밍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이미 현장에서 트리밍을 한 이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셈인데, 피사체를 앵글에 담을 때 화면 속의 주인공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니까. 그리고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을 신뢰해야 돼요. 감독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를 100퍼센트 담아내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근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내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에 전이되는 순간이 있다는 게 저의 작은 철학이에요.” 마음이 마음을 찍는 영상의 미학인 걸까? “그리고 어떨 때는… 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더 정확할 때도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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