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흥행 감독’에서 ‘작가 감독’이 된 배창호. <정>(00)은 그 에너지가 가장 충만했을 때 만든 영화였다. <러브 스토리>에 이어 다시 한 번 아내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겼던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국적인 것’의 영화적 재현이며, ‘한’이 아닌 ‘정’으로 바라본 우리들의 역사이자 삶이다. <황진이>부터 시도되어 온 ‘절제의 미학’은 <정>에서 비로소 완성된 셈이며, <흑수선>(01)을 거쳐 <길>(06)에서 그 테마를 잇는다. <정>과 <길>은 ‘인디펜던트 작가’로서 배창호 감독의 힘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며, <정>의 옹기와 염색, <길>의 대장간처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감독의 응시다. 특히 <길>에서 그는 대장장이 태석 역을 직접 맡아,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시대에 풀무질을 하고 연장을 만들며 장터를 떠돈다. 이 모습은 배창호 개인의 예술 역정을 연상시키는데,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이렇게 말한다. “외적 상황의 불리 속에서 배창호는 오히려 점점 담백해졌다. 그는 대중영화의 영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작가적 영토를 개척하는 길에 나섰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는 이후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 그는 TV 영화를 준비중이다. <여행>(가제)이라는 프로젝트로, 배창호 감독은 ‘제주’라는 공간을 맡았다. 50분 분량의 에피소드 세 개에 대학생 커플, 신혼 부부, 중년 부부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이 에피소드들은 이후 극장용 장편으로 재편집될 예정이다. “HD 방식으로 촬영되는 저예산 영화예요. 초심으로 돌아가 낮은 마음으로 만들려고 하고요. 6월 중순에 촬영을 시작해 올해 안에 완성할 예정이에요. 맑고 단순하고 담백한, 수채화 같은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여행>(가제)의 촬영이 끝나면, 그는 연극 연출을 할 예정이다. 1980년에 충무로에 발을 디딘 후 올해로 30년. 격변하는 한국영화계 속에서 배창호 감독은 중심을 잃지 않은 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흥행의 짜릿함과 실패의 아찔함을 오고 가야 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는 배창호 감독. 그의 모험은 아직 진행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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