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배창호 - 작가적 길을 가다

 

 



배창호 감독에게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었던 그 무엇이었다. 여기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일상처럼 극장을 찾았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을 다섯 살 때 봤는데 그 영상이 기억이 나요. 아주 강렬하게.” 그 강렬함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막연하게 ‘영화 하는 사람’을 꿈꾸었고, 중학교 시절엔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언제나 부딪히는 법. 대학을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자, 그는 경영학과를 선택한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권유였고, 굳이 영화과를 나오지 않아도 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배창호 감독의 대학 시절은 ‘연극’과 ‘짝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아마추어이긴 했지만, 당시 그는 대학가에서 꽤 알려진 연극배우였다(이명세 감독의 <개그맨>(89)에선 ‘배우 배창호’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연극계의 거장인 오태석 선생은 그의 스승이었고, 소설가 최인호도 그때 알게 되었다. 당시 우연히 만난 근처 대학 연극반 여학생은 그에게 짝사랑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그 학생의 공연을 객석 맨 뒤에서 숨죽이며 바라보았고, 익명으로 꽃다발을 보내곤 했다. 배창호 감독이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묶은 책 <창호야 인나, 그만 인나>는 그때의 경험이 자신의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의 첫사랑의 감정은 <적도의 꽃>(83)과 <기쁜 우리 젊은 날>(87)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적도의 꽃>에서는 자신을 익명의 존재로 숨기며 사랑하는 여인을 관찰하는 외로운 관찰자의 모습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부끄러움 많은 순진한 대학생의 모습으로.”



연극에 빠져 살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영화에 대한 꿈은 여전했다. 종종 들렀던 프랑스 문화원은 그에게 새로운 영화적 세계를 열어주었고, 제대 후엔 영화사 기획실에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유명 제작사였던 화천공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저를 화천공사의 기획실장으로 써주십시오. 1년에 관객 10만 명 이상의 영화를 세 편 이상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힌 그는 가방에서 기획안을 꺼내 브리핑을 시작했고 “만약 저를 기획실장으로 써 주시지 않는다면 영영 후회하실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졸업 후 그는 금융회사에 들어가며 현실과 ‘타협’하는 듯했지만, 영화에 대한 꿈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회사원 시절, 그는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든다. 월급으로 구입한 8mm 카메라로 직접 촬영하고 연출하고 편집한 <다른 사람은 모른다>라는 16분짜리 단편이었다. “그때 제 동생이 대학 입시에 실패한 상황이었어요. 동생을 데리고 나가서 하루 동안, 대학에 떨어져서 방황했던 것과 그 심정 같은 것을 표현해보라고 한 후 재구성했죠. 음악도 넣었고 ‘한국소형영화동우회’에서 시사회도 했어요.”


종합상사로 직장을 옮긴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지사를 설치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 떠나기 몇 달 전에 최인호 작가의 소개로 이장호감독을 만났고, 그들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훗날을 기약한다. 아프리카의 대자연은 스물다섯 살 청년의 마음을 채웠지만, 빈 자리는 있었다. 바로 영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다행히 나이로비엔 최신식 극장이 많이 있어서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파졸리니의 <아라비안 나이트>,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등의 걸작들을 보며 마음을 달랠 수 있었지만, 그는 이대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일 한 장면씩 시나리오를 썼고, 틈 날 때마다 촬영을 했다. 이때 이장호 감독이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한국으로 “개인 사정으로 사의를 표명함. 후임자를 급히 보내주실 것”이라는 텔렉스를 쳤다. 본사에선 “절대 불가”라고 했지만, 배창호 감독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밤에 몰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진짜 영화를 하기 위해서.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시절, 그의 첫 영화는 <바람 불어 좋은 날>(80)이었다. 그는 이장호 감독에게 안성기를 추천했고, 이 영화는 괜찮은 흥행 성적과 함께, 1980년대를 힘차게 열어 젖힌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게 된다. 3년 전에 썼던 시나리오를 개작한 <정오의 미스터 김>으로 공모전에서 수상한 것도 그 시기였다. 몇몇 영화사에서 데뷔 제안이 왔지만, 그는 <어둠의 자식들>(81)로 한 편 더 연출부 생활을 경험하고 자신의 첫 작품 <꼬방동네 사람들>(82) 현장으로 간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영화 일이었지만, 그는 무작정 들뜨진 않았다.


“조감독 시절, 그 현실이 만만치 않았어요. 일단 경제적인 것인 문제가 컸죠. 저는 영화는 인생을 꾸리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보다는 인생을 더 아끼는 거죠. 데뷔작 준비할 때도, 첫 작품 해보고 능력을 인정 못 받으면 영화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다행히 인정을 받아서 지금까지 17작품을 만들 수 있었지만요.”

그래서 그는 2년 전 대학 강단을 떠날 때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보다는 인생을 더 아껴라”는 말과 함께 “노력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신화일 뿐이다. 그 신화를 너무 맹신하지 마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가치관이 뚜렷하지 못하면 영화감독이라는 존재는, 결국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뼈 아픈 이야기일 수도 있다. 검열과 심의에 의해 67장면이 지적 당하긴 했지만, 서른 살에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했을 때 배창호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기린아였다. 이후 <적도의 꽃> <고래사냥>(8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84) <깊고 푸른 밤>(85) <고래사냥 2>(85)로 이어지는 연이은 흥행은 그에게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과거 한국영화에선 접하기 힘들었던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상업적 장치와 속도감은 ‘배창호’라는 이름을 최고의 흥행사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던 길을 계속 가지 않았다. 흥행은 했지만 작품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고래사냥 2>가 상영되는 극장 앞, 영화를 본 한 여중생이 다가와 던진 “감독님, 공부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요”라는 말은 배창호 감독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반성했다. “사실 2편은 안 하려고 했는데…, 눈이 흐려졌던 거죠. 이왕 하려고 했으면 더 대중적으로 잘 만들었어야 했고. 성공 뒤에 오는 독이랄까? 그 과정을 거친 것 같아요. 살면서 돌아보면, 지금 가지고 있는 ‘정답의 눈’으로 보면 다 후회가 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순 없는 거죠. <고래사냥 2>의 실패가 준 교훈이 참 커요. 성공의 독에 취하면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걸 배운 거죠.”

30대 중반의 시기에 배창호 감독은 극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고, 진지하게 ‘영화란 무엇인가’ ‘나는 영화를 왜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 결과물이 바로 <황진이>(86)다. 배창호 감독은 “<황진이>를 시작하면서 예술로서의 영화는 우리 존재의 참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으며, 우리의 참 모습은 바로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고인이 된 영화평론가 정영일은 “한국영화의 쿠데타다. 이 쿠데타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다”고도 했지만, 배창호 영화의 ‘재미’에 익숙했던 관객들은 롱 테이크와 정적인 화면과 정제된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는 <황진이>에 엄청난 실망감을 표시했다. 극장에선 화면이 왜 이렇게 느리냐고 영사실에 항의하는 관객도 있었다. “<황진이>는 원석을 다듬듯 만들었어요. 내가 탄생시킨 황진이라는 캐릭터의 ‘삶의 여정’에 맞는 표현이 무엇인지 고민했고요. 관습적으로 컷을 만들지 않았고, 영화 자체가 지닌 호흡으로 가려는 시도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관객들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낯선 영화가 된 거죠.” 그렇게 배창호 감독은 ‘성공의 덫’에서 빠져 나왔다. “당시에 내가 조금씩 젖어들고 있던, 영화의 쾌락을 추구해서 얻는 상업적 결과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인간의 비열한 면을 보여주면서 얻은 성공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버린 영화가 <황진이>였어요.”



‘흥행 감독’이라는 월계관을 벗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훨씬 더 담백해졌고 재미를 위한 ‘억지’ 같은 것이 없어졌다. 굳이 관객을 울리려고 하지도 않았고, 영화를 만드는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이 지닌 삶의 느낌을 영화에 그대로 묻어나도록 했다. 그런 면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87)은, 전형적인 순애보 멜로인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새로운 영화였다. 이 영화가 지닌 일상의 디테일은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여러 젊은이들이 지금 충무로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9년엔 뮤지컬로 부활해 무대 위에 올려졌다.

<안녕하세요 하나님>(87)은 배창호 감독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우화적 방식이지만 비교적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영화일 것이다. “데뷔작부터 제 영화엔 기독교적 알레고리가 있었어요. 저는 기독교를 교조적인 방식보다는 어떤 보편성으로 받아들였어요.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크리스천적일 거라고 본 거죠. 삶을 진짜 잘 그리려면, 정말 종교적이어야 해요. 채플린도 그랬죠. 종교성 없이 어떻게 영화를 찍을 수 있느냐고,” 이후 배창호 감독은 자신의 조감독이었던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89)에 배우로 출연하고, 산호세주립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연출자로서 3년의 공백을 가진다. 그리고 내놓은 <꿈>(90)은, 욕망과 집착 속에 살았던 과거를 뒤돌아보며 “인생은 꿈”이라는 테마를 이야기한다.



충무로의 시스템은 격변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 그는 ‘배창호 프로덕션’이라는 독립 제작사를 설립하고 <젊은 남자>(94)를 내놓는다. 이어 제작한 <러브 스토리>(96)는 감독 스스로의 모습이 가장 많이 스며들어 있는 ‘자화상’ 같은, “가장 즐겁게 일했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소박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영화다. 배창호 감독은 1993년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김유미 씨와 결혼했는데, <러브스토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배창호 감독과 아내가 직접 등장해 보여준다. 이것은 큰 모험이었다. 배우만 바꾸면 제작비를 대겠다는 투자사도 있었지만, 그러면 영화를 할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화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를 기용하면 그 배우의 톤을 좇아야 하고, 그러면 또 환상을 좇게 되는 거죠.” 배창호 감독은 직접 제작비를 마련했다. 흥행에 실패할 것은 이미 각오한 상태.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러브 스토리>가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고, 그 열정으로 <깊고 푸른 밤>까지 갔어요. 그런데 열정만으로는 지쳐요. 그래서 열정에 성취욕, 출세욕, 명예욕을 더하니까, 매번 숨이 막혔죠. 흥행해야 하고 평도 좋아야 하고…. 그러다가 <황진이>를, 열정이 아닌 ‘의미’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다른 에너지가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러브 스토리>였고, 그때부터 ‘애정’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거죠.”


어느새 ‘흥행 감독’에서 ‘작가 감독’이 된 배창호. <>(00)은 그 에너지가 가장 충만했을 때 만든 영화였다. <러브 스토리>에 이어 다시 한 번 아내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겼던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국적인 것’의 영화적 재현이며, ‘한’이 아닌 ‘정’으로 바라본 우리들의 역사이자 삶이다. <황진이>부터 시도되어 온 ‘절제의 미학’은 <정>에서 비로소 완성된 셈이며, <흑수선>(01)을 거쳐 <>(06)에서 그 테마를 잇는다. <정>과 <길>은 ‘인디펜던트 작가’로서 배창호 감독의 힘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며, <정>의 옹기와 염색, <길>의 대장간처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감독의 응시다. 특히 <길>에서 그는 대장장이 태석 역을 직접 맡아,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시대에 풀무질을 하고 연장을 만들며 장터를 떠돈다. 이 모습은 배창호 개인의 예술 역정을 연상시키는데,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이렇게 말한다. “외적 상황의 불리 속에서 배창호는 오히려 점점 담백해졌다. 그는 대중영화의 영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작가적 영토를 개척하는 길에 나섰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는 이후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 그는 TV 영화를 준비중이다. <여행>(가제)이라는 프로젝트로, 배창호 감독은 ‘제주’라는 공간을 맡았다. 50분 분량의 에피소드 세 개에 대학생 커플, 신혼 부부, 중년 부부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이 에피소드들은 이후 극장용 장편으로 재편집될 예정이다. “HD 방식으로 촬영되는 저예산 영화예요. 초심으로 돌아가 낮은 마음으로 만들려고 하고요. 6월 중순에 촬영을 시작해 올해 안에 완성할 예정이에요. 맑고 단순하고 담백한, 수채화 같은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여행>(가제)의 촬영이 끝나면, 그는 연극 연출을 할 예정이다. 1980년에 충무로에 발을 디딘 후 올해로 30년. 격변하는 한국영화계 속에서 배창호 감독은 중심을 잃지 않은 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흥행의 짜릿함과 실패의 아찔함을 오고 가야 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는 배창호 감독. 그의 모험은 아직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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