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오드리 헵번 - 할리우드 영화배우, 유니세프 친선대사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 말은 전 세계 신문에 헤드라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기부문화를 불러 일으켰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굶주린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정렬을 짧은 시간 동안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다.


은막의 스타를 뛰어 넘은 진정한 스타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었다. 1992년 9월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있었다. 소말리아는 그녀가 방문했던 그 어떤 지역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죽은 어린이들은 쇼핑백만한 자루에 담겨 묻혔다. 오드리 헵번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았으며 마음 깊이 함께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쌓은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지만, 구호 현장에서는 절대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인간 오드리 헵번으로서 어린이들을 대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기꺼이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아픈 아이의 눈썹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내쫓았다. 전쟁지역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했으며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 왕년의 스타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구호활동에 감동했고 새로운 기부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녀 이후 많은 명사들이 진심이든 혹은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 들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진짜 스타였다.


유럽의 숙녀에서 할리우드의 스타로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계였으며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의 본래 성은 러스턴으로 헵번가와는 먼 친척 뻘이긴 했으나 그다지 관련은 없다고 한다. 그녀가 헵번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다소 사회적으로 불안정 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이름과 성을 바꾸면서 먼 친척 뻘인 헵번을 러스턴 앞에 붙여 헵번-러스턴이라는 성을 쓰게 되면서 부터였다.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당시 유럽에 유행처럼 번지던 우익 파시즘의 신봉자들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곧 파시즘의 문제점을 깨닫고 빠져 나왔지만, 아버지는 깊이 관여 하고 있었으며 결국 오드리 헵번이 6살 나던 해 가출해 사라지고 말았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가출 후 나치에 적극 동조하다가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였고 이후는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과거와 가족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녀가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이 후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력이 세상에 알려져 스캔들이 될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연락을 오드리 헵번에게 숨겼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을 일약 스타로 뛰어 오르게 한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오드리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다. 어린 시절은 외가의 재력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그다지 곤궁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유럽대륙이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가난은 2차 대전 중에 극에 달했으며 이 와중에 오드리 헵번은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큰 키는 발레리나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계속된 가난은 그녀가 헛된 꿈을 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무명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소설가 콜레뜨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오드리 헵번을 전격 캐스팅했고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적이지 않은 유럽풍 숙녀의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를 찾고 있었다.

1953년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를 실감할 수 있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한편으로 그녀는 유행의 중심이 되었고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우상이었으며 남성들의 연인이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승승장구 한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세계도 구축해 나갔다.


평탄치 않았던 두 번의 결혼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오드리 헵번은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희구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것일 때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결혼 당시 오드리 헵번은 25세였으며 배우자 멜 퍼러는 이 결혼이 세 번째였고 오드리 헵번보다 12살이 많았다. 결혼은 오드리 헵번의 영화배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멜 퍼러의 충실한 배우자였지만 여전히 뛰어난 흥행 여배우였다. 남편 멜 퍼러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제작자였고 프로듀서, 감독이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멜 퍼러와의 사이에 아들 숀을 얻었고 멜 퍼러가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14년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에게서 종종 발생하는 열등감이 오드리 헵번 부부를 힘들게 했다. 멜 퍼러 자신도 유명한 영화 배우였지만, 오드리 헵번의 눈부신 명성 앞에서는 늘 기가 죽었다. 여기에다 매력적인 남자였던 멜 퍼러가 외도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었다는 점도 부부 생활에 문제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 출연 당시 남편 멜 퍼러와 오드리 헵번

어린 아들 숀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은 피해보려 했던 오드리 헵번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1968년 이혼을 하였다. 평온하고 안정된 가정을 꿈꾸던 오드리 헵번의 가장 중요한 희망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혼의 충격을 달래 준 것은 우정 관계였던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였다. 그녀보다 9살 연하였던 도티는 멜 퍼러와 이혼 후 혼란스러운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들 숀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둘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아온 오드리 헵번에게 도티의 따뜻한 가족과 친척들은 새로운 세계였다. 이듬해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에서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식을 올리고 로마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배우로서의 삶을 접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멜 퍼러와의 결혼 기간 동안 유명 여배우였기 때문에 발생한 가정생활의 갈등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오산이었다. 청소년 시절 <로마의 휴일>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도티는 그녀가 그저 평범한 아내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도티는 평범한 여인 오드리가 아니라 배우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것이다. 도티와의 사이에 아들 루카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오드리 헵번에게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안드레아 도티는 이탈리아 남자답게 외도에 거부감이 없었고 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그의 외도는 번번히 가십기사로 다루어졌다. 결국 도티와의 결혼 생활도 1979년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드레아 도티와 이혼 후 오드리 헵번은 진정한 소울 메이트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나지만 다시는 결혼하지 않는다. 오드리 헵번은 월더스와의 사이를 ‘결혼이 서로에게 얻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로버트 월더스는 오드리 헵번을 만난 이후 그녀의 구호 활동을 도왔으며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다
오드리 헵번의 구호 활동은 의뢰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1988년 오드리 헵번은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조용히 은둔하며 왕년의 스타로서 흠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그것도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드리 헵번은 흥분했다. 유니세프 쪽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 측에서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다.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오드리 헵번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녀는 즉시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유명인 친선 대사가 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참가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오드리 헵번은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았기에 소속사도 없었고 까다롭게 스케줄을 조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다. 일 년에 보수가 단지 1달러이며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조차 내주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오드리 헵번은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선기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그녀의 구호 활동은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깊이를 더해갔다.

구호지역에서 어린이와 함께 웃고 있는 오드리 헵번

구호의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그녀는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다. 오드리 헵번의 노력으로 전 세계인들은 구호활동에 대해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명사들뿐 만 아니라, 누군가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구호 운동에 일반인들도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정열적인 유니세프 활동은 구호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나날이 쇠잔해지고 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일정과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은 오드리 헵번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직전부터 오드리 헵번의 건강은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며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될까 봐 노심초사 했다. 그리고 무리해서 방문한 소말리아에서 아랫배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다.

스위스 톨로세나에 있는 오드리 헵번의 무덤(photo by Alexandra Spiirk)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도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인터뷰와 행사에 쫓기며 그녀는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일정이 마무리 된 1992년 11월, 오드리 헵번은 로스엔젤레스의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했지만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단지 3달만이 허락되었다. 병원 치료가 무의미해진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고요하게 보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맞은 크리스마스에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유언처럼 읽어 주었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소울 메이트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스위스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 동료와 전세계인들의 애도 속에서 묻혔다. 오드리 헵번 생전의 정열적이고 진심 어린 구호활동은 이후 유니세프와 민간 구호 단체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대표적 영화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3년작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앤공주로 분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영화 속 그녀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으로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다. 고급 콜걸인 홀리로 분한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에서 <문리버>를 직접 불러 그 매력을 발산했으며 <문 리버>는 이후 그녀의 주제곡이 되었다. 보석상 <티파니> 앞에서 초라한 아침을 먹으며 화려한 보석을 감상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 하나의 세계적 연인을 탄생시켰다.


버나드쇼의 원작 <피그말리온>을 뮤지컬 영화로 만든 조지 큐커 감독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무식한 거리의 꽃 파는 아가씨에서 우아한 숙녀로 변모하는 돌리틀로 분해 그녀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 (올웨이즈)>에서 오드리 헵번은 주인공을 돕는 천사 역할로 출연한다.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말년의 오드리 헵번의 성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의 출연료 대부분을 유니세프의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