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다. 어린 시절은 외가의 재력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그다지 곤궁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유럽대륙이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가난은 2차 대전 중에 극에 달했으며 이 와중에 오드리 헵번은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큰 키는 발레리나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계속된 가난은 그녀가 헛된 꿈을 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무명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소설가 콜레뜨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오드리 헵번을 전격 캐스팅했고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적이지 않은 유럽풍 숙녀의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를 찾고 있었다.
1953년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를 실감할 수 있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한편으로 그녀는 유행의 중심이 되었고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우상이었으며 남성들의 연인이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승승장구 한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세계도 구축해 나갔다.
평탄치 않았던 두 번의 결혼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오드리 헵번은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희구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것일 때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결혼 당시 오드리 헵번은 25세였으며 배우자 멜 퍼러는 이 결혼이 세 번째였고 오드리 헵번보다 12살이 많았다. 결혼은 오드리 헵번의 영화배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멜 퍼러의 충실한 배우자였지만 여전히 뛰어난 흥행 여배우였다. 남편 멜 퍼러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제작자였고 프로듀서, 감독이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멜 퍼러와의 사이에 아들 숀을 얻었고 멜 퍼러가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14년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에게서 종종 발생하는 열등감이 오드리 헵번 부부를 힘들게 했다. 멜 퍼러 자신도 유명한 영화 배우였지만, 오드리 헵번의 눈부신 명성 앞에서는 늘 기가 죽었다. 여기에다 매력적인 남자였던 멜 퍼러가 외도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었다는 점도 부부 생활에 문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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