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김형구 - 영화감독들의 눈

 



 

김형구 촬영감독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명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적극성’의 가장 좋은 증거는 지난 15년 동안 그가 촬영감독으로서 쌓아온 21편의 필모그래피다. 가끔씩은 그가 연이어 찍은 영화를 보면서, 과연 한 명의 촬영감독이 작업한 것이 맞나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1,700컷에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과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비트>(97) 다음에, 그는 130컷의 정적인 스타일이었던 <아름다운 시절>(98) 현장에 있었다. 그 다음엔 <태양은 없다>(99)와 <이재수의 난>(99)이 이어진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04) 다음엔 <역도산>(04)이었다. 한강변에서 <괴물>(06)을 마친 후엔 <해변의 여인>(06)을 찍기 위해 바닷가로 갔다. “저는 감독을 도와서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운이 좋아서 다양한 스타일과 장르의 영화를 했던 것 같고요.”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예술 애호가셨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술의 세계를 선사했다. “오페라 아리아를 좋아하셔서 주말 아침마다 틀어놓으셨어요. 그 영향으로 대학교 때까지 클래식에 심취해 있었고요. <투게더> 찍을 땐 그 덕을 보기도 했어요. 바이올린 연주 장면이 많았는데, 파이널을 장식한 음악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죠. 고등학생 때 이미 다 외웠던 곡이었어요. 카메라를 고정한 상태에서 한 테이크를 갔는데, 움직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첸카이거 감독에게 얘기했죠. 카메라를 조금 흔들어보면 어떻겠냐고.” 그는 그 장면을 지휘하듯 찍었고, 결국 그 장면이 영화에 쓰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선물은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밤마다 환등기로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었고, 김형구 촬영감독은 자연스레 그 이미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중학생 때 사진반에 들었다고 하자, 아버지는 집에 있던 카메라 두 대 중 한 대를 선물해주셨다. 그 카메라는 그가 지금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게 된다. 주로 찍었던 사진은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straight photography). 정물 사진이지만, 사진에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은 스타일이었고 당시 그 작업은 이후 “영화 촬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김형구 촬영감독은 말한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던 그는 ‘영화마당 우리’라는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혼자 찍는 거잖아요? 그런데 나는 혼자 하는 작업이 그렇게 즐겁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영화마당 우리’에 갔더니 영화는 여럿이 하는 작업이었어요. 시나리오 쓰면서부터 서로 투닥거리고. 저는 그게 좋았어요. 나중엔 단편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사진 전공을 하니까 제가 자연스럽게 촬영을 하게 됐고요.” 생애 처음으로 잡아본 영화 카메라. 첫 컷은 패닝(panning. 카메라 축을 고정한 채 수평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스틸 사진엔 그런 게 없잖아요? 처음으로 동영상을 찍는 건데…. 어떤 속도로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속도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영화에 매료되긴 했지만, 김형구 촬영감독은 대학을 졸업한 후 그냥 취직을 하려 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 사진기자로 원서를 냈는데 다 떨어졌죠.(웃음)” 이때 누가 영화아카데미를 지원해 보라고 했고, 그는 영화아카데미 4기로 입학한다. 김태균 감독, 오석근 감독 등이 동기였다. “정말 좋았어요. 처음으로 정규 영화교육이라는 걸 받게 되었으니까요.” 그곳에서 스승이었던 고 유영길 촬영감독을 만났고,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엔 유영길 촬영감독의 촬영부에서 <칠수와 만수>(88) <성공시대>(88) <개그맨>(89)의 스태프로 일하게 된다. 이후 영화아카데미 동기들과 ‘영화공장’이라는 그룹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촬영 중 중도하차하기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던 그는 유학 길에 올랐다.


AFI(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이 있다면 ‘시스템’이었다. 도제 시스템 속에서 촬영부와 조명부가 분리되어 있던 충무로와는 달리, 미국은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이었다.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직접 잡지 않고, 전체적인 비주얼 컨셉트를 담당하는 방식이었고 촬영을 담당하는 카메라 오퍼레이터와 조명을 담당하는 개퍼(gaffer)가 따로 있었다. “굉장히 신선했죠. 좋은 조명과 좋은 촬영이 함께 가야 좋은 화면이 나온다는 생각을, 둘은 나눠질 수 없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결국 촬영과 조명은 하나인 거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충무로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이때 한 영화사가 아동용 영화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처음엔 비디오용이었던 것이 극장용으로 바뀌면서 김형구 촬영감독은 얼떨결에 촬영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촬영감독’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건, 당시 충무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촬영감독협회의 인준이 없으면 절대로 촬영감독이 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때 그는 ‘황기성 사단’에서, 역시 유학파였던 이광훈 감독과 함께 <닥터 봉>(95)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촬영감독협회에서 영화사로 공문이 날아왔다. 비회원으로 계속 촬영을 진행한다면 이후엔 어떤 협회원도 황기성 사단의 영화는 찍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황기성 사장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이제 우리 영화는 네가 다 찍어야겠다’ 그러시더라고요. 참 고마우신 분이죠. 이광훈 감독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젊은 사람을 믿어주셨으니까요.” 협회의 압력으로 기자재 대여가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촬영은 마무리되었고 <닥터 봉>은 1995년 한국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한다.

<진짜 사나이>(96)를 찍던 1995년 즈음, 충무로의 압박은 조금 유연해졌다. “협회장이었던 김남진 촬영감독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열린 마인드를 가진 분이셨죠. ‘지금 데뷔해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저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일단 협회원으로 영입하자. 막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그러시면서 받아주셨어요.” 당시로선 ‘특별 케이스’였지만, 아무튼 김형구 촬영감독의 이후 활동에서 기존 충무로 시스템과의 마찰은 거의 사라진다. 이때 만난 영화가 김성수 감독의 <비트>(97)였다. 사실 김성수 감독과의 인연은 4년 전 <비명도시>라는 단편을 촬영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상태였고, 당시 한국에선 흔치 않았던 35mm 단편영화였던 <비명도시>의 촬영 제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모두 나이트 신으로 진행되었기에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믿고 맡기는 김성수 감독과의 신뢰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김성수 감독의 데뷔작 <런어웨이>(95)는 함께 하지 못했고 <비트> 때 만났죠. 워낙 원작이 유명했기에, 우린 영화적으로 뭔가 새로운 비주얼을 풀어나가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죠.”



영화아카데미와 AFI에서 영화를 배우긴 했지만, 김형구 촬영감독에게 진정한 영화학교는 김성수 감독의 현장이었다. “<비트> <태양은 없다>(99) <무사>(01)를 하면서, 표현 기법에 대한 수많은 실험을 했던 것 같아요. 김성수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김 감독은 저에게 영화 스승이나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정말 좋은 기회를 준 거죠.” 당시는 후반작업보다는 현장 촬영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시절. “우리가 왕가위보다 더 잘 썼다고 생각한다”며 웃으며 말하는 <비트>의 스텝 프린팅, <태양은 없다>의 저속 촬영, 그리고 <무사>의 개각도 촬영(카메라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줄여 액션에 변화를 주는 것) 등은 김성수 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대표적인 성과다.

김형구 촬영감독의 스펙트럼은 점점 넓어진다. 대부분 1분 이상 지속되는 쇼트로 구성된 <아름다운 시절>(98), 광활한 공간을 무대로 했던 <이재수의 난>(99) 등은, 그가 어떠한 연출가와 어떠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더라도 가장 적절한 스타일을 찾아낼 줄 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박하사탕>(00)은, 그가 자신의 최고작 중 하나라고 자평하는 작품이다.

“그 어떤 영화보다 심혈을 기울였어요. 이창동 감독님도 한 쇼트 한 쇼트 정성을 들이시는 분이셨고요. 사실 우리 눈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걸 화면으로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한 장면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조명 작업을 해야 하고. <박하사탕>에선 정말로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그만큼 공을 들였고, 저는 이 영화로 촬영상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주더라고요.(웃음) 김성수 감독 영화로는 다 촬영상을 받았거든요? 아무래도 자극적인 화면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건가 싶기도 했죠.(웃음)” 설경구의 그 열연과,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그 이야기가, 그토록 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배경엔 김형구 촬영감독의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더욱 다양해진다. 허진호 감독과는 <봄날은 간다>(01)과 <행복>(07)을 작업했고, 홍상수 감독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04) <극장전>(05) <해변의 여인>(06)을 작업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03) <괴물>(06)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04)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어김 없이 관객들에게 어떤 ‘장면’을 남겼다.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감독과 다양한 성격의 영화를 작업하면서, 그는 감독의 의도를 가장 충실하게, 그러면서도 안정적이며 인상적으로 옮기는 촬영감독이 되었다. “새로운 감독과의 작업이 저에게 새로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을 예로 들면, 사실 첫 작품에선 쉽지 않았어요. 좋은 장면에 대한 느낌이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을 느껴 보려고 했죠. ‘도대체 저 장면을, 뭘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걸까.’ 제가 어떤 ‘그림’을 만들기보다는, 그 감독 안으로 들어가서 왜 이렇게 만들까 생각해보는 거죠.” 그러다 보니 <극장전>에선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줌’(zoom)을 이용한 장면이 등장하게 되었고, <해변의 여인>은 서로에 대한 신뢰감으로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 영화로 촬영상 후보에 오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해변의 여인>이 후보에 올라서 깜짝 놀랐죠.(웃음).”

봉준호 감독과의 작업도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동세대의 감독들과 주로 작업했던 김형구 촬영감독이었기에,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봉준호 감독이 조금은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하사탕>의 화면에 반한 봉준호 감독은, 첸카이거 감독의 <투게더>(02)의 중국 촬영장까지 와서 <살인의 추억>의 카메라를 부탁했다. “정말 똑똑한 감독이 한 명 나왔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했고, 한 신 한 신 조목조목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보다 나이는 꽤 어리지만 나중엔 ‘존경심’까지 생길 정도였죠.(웃음)” 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은 화면을 만들기 위해 ‘블리치 바이패스(bleach bypass. 현상 과정에서 필름의 은 입자를 남기는 것) 기법을 사용한 이 영화는, 김형구 촬영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다른 세계를 열었고 그것은 <괴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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