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영화인 송길한 - 시나리오의 교과서

 


 
그가 임권택 감독과 함께 1980년대에게 합작한 영화들은, 당대 가장 진지한 작품들이었으며 현재도 ‘교과서’로서 손색 없다. 최동훈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이 한국 시나리오는 잘 안 읽는데 그 중에 걸작들이 굉장히 많다. 난 요즘도 작업실에서 잘 안 풀릴 때 보는 게 송길한 선생의 <짝코> 시나리오다. 얼마나 기본기나 구조가 중요한지 말해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오다가 시나리오 작가가 된 건 아니었다. 송길한 작가가 영화인이 된 건 운명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영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채플린 영화 보러 갔다가, 미성년자는 안 된다고 해서 부모님은 영화관에 들어가시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우선 나고….(웃음) 전쟁 끝나고 이강천 감독이 전주에서 <아리랑>(54) <피아골>(55) 같은 작품을 찍을 때 호기심으로 구경을 했는데,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 너무 재밌게들 일하고 열정도 대단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재미있을까 싶기도 했고….(웃음)”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수상한 세월 속에서, 그는 1학년 때 4.19 학생운동을 겪었고, 군에서 제대한 후 백수 시절에 별 생각 없이 <동아일보> 신춘 문예의 ‘시나리오 부문’에 응모했다. <흑조>라는 작품이었다. “시나리오 작법 같은 건 전혀 몰랐죠.” 이때 심사위원을 맡았던 극작가 오영진은 송길한 작가의 첫 스승이었다. “굉장히 좋게 평가해주셨어요. 수업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분의 도움으로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요.” 그러나 신춘 문예에서 당선되었다고 해서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충무로 제작자나 감독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설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죠.(웃음) 그러다가 어느 감독에게서 <흑조>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안 그래도 딸리는 역량으로 쓴 그 모자란 시나리오를, 더 대중적이고 쉽게 다운시켜서 다시 써 달라는 거예요.”

공모전을 통해 작가적 자질을 인정받긴 했지만, 송길한 작가는 이내 환멸을 느끼고 곧바로 영화계로 들어오지 않았다. ‘현업 작가’가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그때는 작가가 작품을 쓸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미 제작사의 기획이 있고, 누가 이렇게 하자고 그러면 그냥 했던 것이지,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쓰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최루성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나 액션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 ‘반공 영화’ 혹은 ‘국책 영화’라는 이름으로 충무로가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해야 했던 시대. 1970년대, 즉 송길한 작가의 30대는 그렇게 지나간다.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은 그의 작가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만남의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책 영화’였다. 당시 전방의 탱크 부대에서 폭발 사건이 있었는데, 어느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리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했던 것. 충무로의 한 제작사는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기획하면서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를 불렀다. “나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님도 당시까지 하던 작품으로부터 벗어나 변화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어요.”

이미 <족보>(79) <깃발 없는 기수>(80) 같은 영화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세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송길한 작가가, 이때 제안한 영화가 바로 <짝코>(80)였다. 짤막한 원안이 있긴 했지만, 송길한 작가의 창작이나 마찬가지였던 작품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의 이념 갈등 속에서 살아가던 두 남자의 엇갈린 인생을 그린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 안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던 작품.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자신들의 가족사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짝코> 작업은 그야말로 의기투합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념에 희생당한 인간’을 그린 이 영화는 대종상에서 반공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에 씌워진 ‘반공 영화’라는 이름은 누명이죠. 이데올로기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 파괴되는 허망한 세계는 어렸을 때 전쟁을 겪으면서 내 안에 축적되었던 것이고, 마찬가지였던 임권택 감독과 만나 <짝코>라는 영화로 나온 것이니까요.” 당시 <짝코>는 한 극장에서 편성에 차질이 생기자 임시 방편으로 6일 동안 상영한 것으로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 영화는 이후 재발견되었고 평론가들에 의해 1980년대의 중요한 한국영화로 재평가되었다.



이후 송길한 작가와 임권택 감독의 파트너십은 <씨받이>(87)까지 8작품 동안 계속된다. 1970년대 초부터 변화를 모색했던 임권택 감독의 노력은 1980년대 송길한 작가의 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셈이다. <짝코> 이후 그들이 두 번째로 함께 한 작품은 김성동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만다라>(81). 불교 교단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루었던 소설 <만다라>는, 영화에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두 젊은이가 자기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을 그린 것이죠. 그 길을 가는 두 승려의 ‘구도의 길’과 완성을 한 번 이야기하고 싶었고요.” 배경이 겨울이라 눈이 녹기 전에 촬영에 들어가야 했고, 갑자기 각색을 맡게 되어 어느 여관에 틀어박혀 4일 동안 한숨도 안 자고 썼던 <만다라> 시나리오. 이 작품 안엔, 그가 만들어냈던 수많은 캐릭터들 중 작가와 가장 닮은 사람이 있다. 바로 전무송이 역할을 맡았던 지산 스님이다.

“내가 그렇게 파격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틀에 갇히는 건 싫어해요. 지산처럼 술을 잘 마시기도 하고.(웃음) 나한텐 안티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순응하기보다는 일단 거부해놓고 확인하는 그런 성격, 그런 면에서 지산이라는 캐릭터가 좋았고, 선문답 같지만 의미가 꽉 차 있는 지산의 대사에 심취되어 있기도 했죠.”

영화 <만다라>(1981)의 한 장면

이후 그는 작가로서 승승장구한다. <만다라>로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의 시나리오 부문에서 수상했고, <우상의 눈물>(82) <안개마을>(83) <불의 딸>(83) 등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이 이어졌으며, 정진우 감독과 작업한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83)으로는 영평상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이나 제작자였던 이태원 대표만큼이나 송길한 작가에게도 큰 상처로 남은 작품이다.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비구니>는 <만다라>와 짝을 이루는 작품. <만다라>가 소승적 차원에서 개인의 고행을 담는다면, <비구니>는 한 여승이 전쟁을 겪으며 겪는 대승적 수행의 길을 그린다. 하지만 당시 불교 교단의 압력으로 제작이 중단되었고, 안타깝게도 촬영된 필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이 찍은 전쟁 신 중 <비구니>의 전쟁 장면이 압도적으로 잘 찍혔다고도 했죠. 그때 그 영화를 만들었던 열정을 생각하면, 만약 그 작품이 완성되어 칸영화제 같은 데 나갔다면, 세계적으로 한국영화의 수준을 알리는 데 10년은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사전 검열과, 개봉 전의 심의와, 종교 단체나 이익 집단의 외압이 창작자의 숨통을 조여오던 1980년대. 그 시절에 의식 있는 시나리오 작가로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이렇게 쓰고 그대로 찍어서 통과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엄청난 압박을 주었던 시절이죠. 뭘 쓰기 전에 겁부터 났고. 그러면서 우린,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게 아니라 우회하는 데 도가 트기 시작한 거예요.(웃음) 그런 데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티켓>(86) 같은 경우는 한 롤(15분 정도)이 삭제되기도 했어요. 반사회적이다 뭐다 해서. 한때는 정말 영화를 그만두려고도 했어요.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겠으니까. 예술가로서 수모라면 수모였을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참고 이겼던 게 저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송길한 작가의 시나리오는 철저히 현실에서 시작한다. 그의 동생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며 <넘버 3>(97) <세기말>(99)을 만든 영화감독인송능한은 이렇게 말한다. “형님이 늘 말씀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물들에겐 사람의 땀 냄새가 나야 하며, 그들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란 결국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또, 시나리오는 머리가 아니라 발로 써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신다.”

“(작업 방식을 말한다면) 생긴 대로 우직한 편이었어요.(웃음) 별로 영리하진 못했지만, 이상하게 책임감은 남 다른 편이었고. 주문을 받은 작품에 대해서는, 그 작품의 격이나 질이 어떻든 간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어요. 그건 순전히 역량 부족과 우직한 성격 탓이었던 것 같아요.” 송길한 작가의 시나리오가 지닌 힘은, 그런 우직함과 함께 ‘현장’에서 나온다. 영화는 허구일 수밖에 없지만, 임권택 감독이 말한 것처럼 송길한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는 “허구이되 우리 삶 안에, 생활 안에 늘 있는 내용”이다.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쓰는 것과, 그 작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등장하는 인물을 비슷하게라도 경험해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거든요. 그런 경험에서 얻어지는 아이디어가 실제 영화에서 표현되면, 그 이미지가 지니는 생명력은 대단해요. 그래서 저는 실제로 장소를 헌팅하지 않거나 인물을 만나 취재하지 않으면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어요.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부분은 강조해요. 직접 체험은 안 하더라도 접근은 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촬영 현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책상 앞에 앉아 썼던 것과 실제 현장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대사가 변할 수도 있고. 녹음실에서 대사 녹음이 끝날 때 비로소 시나리오가 끝난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보니까 그렇게 체질화되어 있더라고요.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상상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했던 것 같아요.”
철저한 현장성과 함께, 송길한 작가의 스타일에서 중요한 것은 플래시백 구조다. 좀 더 스피디한 진행 때문을 위해서인지 최근 한국영화에선 잘 사용하지 않지만, 송길한 작가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감정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짝코>나 <길소뜸>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일단은 30년 이상의 긴 세월을 담기 위한 방법이겠죠. 그 세월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선, 과거의 아팠던 기억들이 현재의 플롯과 복합적으로 잘 얽히게 하고, 그 기억이 현재의 이야기에 강한 추동력을 주기도 해요.”

영화인 차승재 - 브랜드가 된 제작자

 



그런 면에서 1988년에 설립된 신철 대표의 ‘신씨네’는 한국영화에 ‘기획’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마련했고, 신씨네가 제작을 시작하면서 대기업 자본과 창투사 자본이 충무로로 유입되었다.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가 등장한 시기도 이때였고, 그들은 이른바 ‘프로듀서 1세대’로 지칭된다. 신철, 유인택, 안동규 등의 선배들을 거쳤던 차승재 대표는 저널이 지칭하는 ‘프로듀서 2세대’의 대표적인 제작자다. 1995년 우노필름을 설립했고, 2000년 싸이더스를 거쳐 2006년 싸이더스FNH 이후 현재까지, ‘제작 차승재’라는 레이블이 붙은 영화는 60여 편. 그러한 ‘다산성’ 속에서 그는 다양한 영화를 내놓았고, 그 규모와 스타일과 장르는 끊임없는 시도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어떤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겪었던 것에 비해, 젊은 시절의 차승재 대표는 ‘일반 관객’에 가까웠다. “영화야 뭐 남들 좋아하는 만큼 좋아했고…. 영화보다는 책을 좋아했어요. 정말 책은 나이에 비해 빨리, 그리고 엄청 읽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뿌리 깊은 나무>를 읽었으니까. <대화>라는 잡지도 기억이 나고. <현대문학> <문학사상> 같은 잡지도요. 그렇다고 ‘문학 소년’이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당시의 독서 습관은 이후 제작자가 되어서도 꾸준히 이어졌고, 그것은 그의 영화 인생을 지탱해준 소중한 자산인 셈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고, 졸업 후엔 의류업으로 꽤 많은 돈을 모으기도 했지만, 그의 삶 한 부분엔 영화가 있었다. 대학 시절 친구이자 영화아카데미 4기였던 김태균 감독(이후 싸이더스에서 <화산고>(01) <늑대의 유혹>(04) 연출)은, 차승재 대표를 영화계로 이끈 견인차 역할을 했다. 김태균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였던 이현승 감독(<시월애>(00) 연출), 김형구 촬영감독(<비트>(97) <무사>(01) <살인의 추억>(03) <역도산>(04) 등 촬영), 진영환 촬영감독(<늑대의 유혹> 촬영), 오석근 감독(차승재 대표가 기획했던 <101번째 프로포즈>(93) 연출) 등과 함께 차 대표의 카페를 찾곤 했고, 그는 자연스럽게 현장을 접하게 된다. “김태균 감독이 1989년쯤에 ‘영화공장’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거기 식구였죠. 그때 이명세 감독을 만났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90) 현장 일을 조금 돕기도 했어요. 그리고 옷 장사 할 때, 오석근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92)에선 일을 많이 했죠. 거의 제작부 일을 했으니까요.”

<걸어서 하늘까지>(92)에서 제작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제작 스태프가 된 그는, 당시 충무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제작자들과 한 편 한 편 작업하며, 조금씩 내공을 쌓아간다. “<걸어서 하늘까지>(92) 끝나고, 신철 대표의 신씨네에서 제작한 <미스터 맘마>(92)의 제작실장으로 갔죠. 다른 사람이 기획한 영화를 진행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기획한 영화를 해볼 것인가, 그런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이후 신씨네에서 <101번째 프로포즈>(93)로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94)을 통해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를, <너에게 나를 보낸다>(94)로는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를 만난다. “신철 대표에게선 ‘크리에이티브’나 기획에 대한 부분을 배웠다면, 안동규 대표에게선 추진력을, 유인택 대표에게선 실용적인 부분과 사람들 사이의 비즈니스를 배웠죠.” 이윽고 하산할 때. 그는 1995년에 우노필름을 만든다.



영화광도 아니었고, 영화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던 차승재 대표는 영화를 만들면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면서, 영화를 배웠다. 우노필름으로 비로소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게 된 차승재 대표. 하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건 아니었다. “제작부로 시작해 정점은 영화사를 차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노필름을 만든 거죠.” 창립작은 김상진 감독의 <돈을 갖고 튀어라>(95)였다. 첫 영화가 망하면 영화사가 없어질지도 모르기에 선택한 “아주 어려운 걸 해서 엉덩방아를 찢는 것보다는 무사히 안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였고, 꽤 괜찮은 흥행을 기록하며 이후 우노필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작은 기반이 된다. “그때만 해도, 지금까지 제작자로 살아남아 이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 줄은 몰랐죠.(웃음)”

차승재 대표의 책장에 쌓인 시나리오들

창립작부터 그렇듯, 차승재 대표는 유독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많이 제작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98)의 허진호 감독, <처녀들의 저녁식사>(98)의 임상수 감독, <유령>(99)의 민병천 감독, <킬리만자로>(00)의 오승욱 감독,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00)의 박흥식 감독, <플란다스의 개>(00)의 봉준호 감독, <지구를 지켜라!>(03)의 장준환 감독, <로드무비>(02)의 김인식 감독, <범죄의 재구성>(04)의 최동훈 감독, <남극일기>(05)의 임필성 감독, <연애의 목적>(05)의 한재림 감독 등이 모두 ‘제작자 차승재’를 통해 자신들의 첫 영화를 내놓을 수 있었다. “조금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그리고 당시엔 신인감독이 데뷔하는 게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그만큼 역량 있는 신인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들과 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고요.” 신인감독을 기용할 때 생기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사용했던 건 스타 시스템.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자신의 영화에 불러모은 건 아니었다. “약간은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많이 했거든요. 그럼에도 성공시켜야 했고요. 그래서 대중적 친숙함을 주기 위한 방책으로 스타 시스템을 많이 사용한 셈이죠.”



과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있긴 했지만, 한국영화계가 현대화된 1990년대 충무로에서 차승재 대표는 영화사를 꽤 규모 있는 기업의 형태로 만들려 했던 최초의 프로듀서다. 여기엔 두 가지의 현실적 문제가 수반된다. 물량과 자본. 많은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투자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과거에 영화 하던 사람들은, 영화 한 편 흥행하면 빌딩 하나 사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사업이라기보다는 장사에 가까웠던 거죠. 장사와 사업이 다른 건, 사업은 중장기적인 목표와 정체성이 있다는 거예요.” 일회성의 흥행을 넘어선, 좋은 제작 시스템으로 영화를 많이 만들 수 있는 회사. 최근 1~2년 싸이더스FNH이 조금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10년 넘게 그가 추구했던 부분이다. “제작자로서 돈을 벌고 싶다면, 시행 횟수가 많아야 하지 않겠어요? 2~3년에 한 편 만들어서 만약에 실패한다면, 이후 2~3년 동안 그 실패에 대한 자책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거죠. 하지만 1년에 세 편을 만든다면, 한 편 실패하더라도 3~4개월 후에 한 편 더 만들면 되는 거고요. 그래서 성공하면, 실패의 고통은 3~4개월에 끝나는 거죠.”

그가 생각했던 ‘규모의 영화경제학’ 이면엔 ‘사람’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영화 한 편이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배울 것이 굉장히 많은데,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다른 회사로 가버리는 거죠. 그러면 연속성이 없어요. 통계도 남지 않고, 노하우도 축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작 인력을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같은 회사에 모인 사람들이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면서, 그 안에서 갈등하고 토론하면서 지향점을 맞춰가는 것. 그가 실천했던, 그리고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이다.


하지만 여기엔 자본이 필요했고, 어쩌면 그의 ‘제작자 인생’은 끊임없이 안정적인 기반을 찾아다녔던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노필름을 만든 지 14년, 네다섯 번의 커다란 ‘자본 변화’가 있었고 그때마다 회사 이름도 바뀌었다. “프로듀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일종의 생명 유지 활동 같은 것?(웃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저널에선 ‘차승재 표 영화’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에서 감지되는, 기존 상업영화와 조금은 다른 그 무엇은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이 아닌 제작자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세우게 한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정 정도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고, 영화에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를 조금 더 담으려 노력했던 건 사실이죠. 꽤 괜찮은 영화로 관객들과 승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요. 운 좋게 몇 편이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영화들이 새로워 보였던 거고.”



제작의 규모에 대한 고민과 함께, 해외 시장에 대한 부분도 차승재 대표가 품었던 화두 중 하나였다. 2000년 이후 그가 제작한 몇 편의 영화에선 ‘내수용’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강하게 엿보인다. “한국에서 영화를 하지만, 극장의 개봉 상황은 글로벌한 거죠. 한국 시장 안에서 세계 영화와 경쟁하는 셈인데…. 사실 한국영화 시장이 전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해요. 하지만 그걸 바꿔서 공격적으로 생각해보면, 개척해야 할 너무 큰 시장이 밖에 있다는 거죠.” 한국영화가 장기적으로 가려면 해외 시장으로 수평적 확산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한국 시장과 가장 유사하다고 판단한 일본 시장과의 친밀감을 높이려 했고, <봄날은 간다>(01)는 한국과 일본과 홍콩이 4:4:2의 비율로 자본을 대고, 각국에서 개봉했던 영화다. <무사>(00)나 <화산고>(00)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한 프로젝트들이었다.

해외 시장과 함께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극장 개봉용 영화’의 틀에서 좀 더 확장된 종합적 콘텐츠였다. 2000년 매니지먼트 업체와 결합해 우노필름에서 싸이더스로 변화를 추구한 건 그런 이유였다. “외국의 ‘영화 선진국’들에겐 모두 수직 계열화된 스튜디오 시스템의 역사가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영화산업에선 프로덕션이 지리멸렬한 상태였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새로운 자본을 결합시키면 한국영화를 활성화할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그래서 신씨네, 우노필름, 명필름을 합쳐 ‘SUM’ 프로젝트를 만들었는데, 영화사들의 결합이라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종류가 다른 소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건 어떨까 생각했고, 싸이더스를 만들게 된 거죠.”



현재 차승재 대표는 영화과 교수로서, 영화제작자협회(이하 제협) 회장으로서 영화제작과 조금 거리가 있는 일들도 겸하고 있다. 특히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4년 남짓한 시간은, 영화제작만큼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좋은 영화를 제작했을 때 보람이 있겠지만, 그건 영화이지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화는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삶의 종속물일 뿐인 거죠. 그런데 제가 지도한 학생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훌륭한 제자로서 성장해 나갈 땐, 500만 명 이상 흥행한 영화를 만든 것보다 큰 기쁨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영화를 이끌어나갈 거고요. 제자도 작품인 것 같아요.”

교육에 대한 부분이 희망한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면, 제협 회장으로서의 일은 제자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현실적 작업이다. 그는 제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영화 노조, 불법 다운로드, 제작 활성화 등 첨예한 현안들과 씨름했다. 게다가 호되게 불어온 경제 한파는 그의 어깨를 좀 더 무겁게 했다. “관객들이 조금은 고운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영화 요금이 2001년 이후 제자리거든요? 어느 정도는 요금이 올라야 산업 전체의 매출 구조가 정상화된다고 봐요. 그리고 예전엔 50퍼센트까지 차지했던 부가판권 시장이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사라졌어요. 쉽고 빠르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 보면 영화가 생산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소비자가 조금 더 비용 부담을 하시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한국영화를 볼 수 있는 구조가 생겨야 할 것 같고요.”

데이비드 린 - 영화 거장의 타계


1984년에 <인도로 가는 길>을 선보였던 데이비드 린 감독은 조셉 콘라드의 작품 <노스트로모>를 영화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1월에 목구멍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그는 오랫동안 골초로 살아왔다. 암 선고를 받은 후 그는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여전히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어.”

데이비드 린은 1년 전인 1990년 3월 8일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평생공로상을 수여 받았다. 그는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이 자리에는 직접 걸어 나왔다. 시상식 장에서 그는 상을 수상했던 역대 감독들을 떠올렸다. 알프레드 히치콕, 윌리엄 와일러, 빌러 와일더 등이 떠올랐다. 그는 이들이 수상한 의미를 되새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모두 영화의 혁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일은 창조적인 탐험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젊고 새로운 감독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물론 그들의 길에는 약간의 위험도 있고, 다소의 돈도 필요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척 예민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행운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1970년 어느 날의 데이비드 린.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 가늠하기 힘든
인간의 깊이를 영상화한 것. 그것이 그를 영화사적인 감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린의 행운은 계속되지 못했다. 시상식 이후 데이비드 린은 <노스트로모>의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1991년 3월에는 영화의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고, 시나리오 작업을 끝마치고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가인 모리스 자르(Maurice-Alexis Jarre)에게 영화음악을 상의하기도 했다. 모리스 자르는 그가 영화에 사용할 음악에 대한 풍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평생을 걸쳐 영화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시상식장에서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꿈꾸었다. 그를 찾아왔던 존 부어맨 감독이 듣게 된 것 역시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이를 위해 싸울 거라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의 목구멍 속에 있는 암은 린의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91년에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결국 4월 22일 런던에서 데이비드 린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이곳에는 데이비드 린 영화에 단골이라 할 수 있는 알렉 기네스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데이비드 린의 영화 세계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 <아라비아 의 로렌스>(1962)에서 알리 족장 역으로 등장하였고, <닥터 지바고>(1965)에서는 지바고 역할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는 한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린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돈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스타도, 여성도, 러브스토리도, 액션도 나오지 않는 4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는데 그 돈을 쓰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사막에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찍는 영화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얼핏 보기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다소 광기 어린 인물처럼 보이는 영국의 장교 로렌스가 전쟁에 참여하여 아랍 부족을 이끌고 승리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영웅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웅담 속에는 개인의 고뇌와 함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숙연한 그림자들이 느껴진다. 대작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야기의 웅장함 이상으로 개인에게 드리워진 복잡 미묘한 성격들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사막의 풍경이다.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린이 펼치는 풍경의 위대함을 느꼈던 것은 지금은 멀티플렉스 형태로 바뀐 충무로의 대한극장이 공사를 앞두고 70밀리 영화들을 상영하던 자리에서였다. 70밀리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와이드한 화면의 느낌은 당시의 낡은 극장의 스크린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시사회를 통해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를 보았던 인상은 또렷하다. 그것은 DVD로는 느낄 수 없는 경험들을 제공해 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독일어판 포스터.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석권. 전세계에서 관객을 휩쓸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는 주인공 로렌스가 자신의 하인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되돌아가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사람들은 로렌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커다란 화면 저편에 하나의 점과 같은 인상이 보인다. 그 점은 점점 더 다가와 로렌스가 하인을 데리고 귀환하는 것이 또렷하게 확인이 된다. 사막의 한 점이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처럼 뚜렷하게 제시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리하여, 혹자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두고 일종의 순수영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다. 사막이라는 단순한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기본적인 구도와 인상들은 오늘날의 감독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는 ‘인상적인 경험’을 구성한다.

<콰이강의 다리>에 나온 알렉 기네스.
그는 후에'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기사 오비완 케노비로 나왔다.

순수한 풍경의 구현과는 달리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은 이 경험이 곧 파괴되고 얼룩지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제시한다. 아랍의 관습법을 따라 로렌스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을 판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사막에서 구해낸 자신의 하인이었다. 영국의 규칙과 관습을 따르자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지만 로렌스를 둘러싼 아랍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법을 요구한다. 로렌스는 아랍인 하인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것은 로렌스가 아랍인들에게 편입되는 순간이자 영국 제국주의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렌스 자신의 일그러진 초상을 직면하는 순간이 된다.

이처럼 복잡 미묘한 순간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내던 시기는 영국 출신의 감독인 데이비드 린이 할리우드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는 시절이었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데이비드 린은 1957년에 <콰이강의 다리>를 시작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화들 덕분에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 받기도 하고, 오스카의 명예를 얻기도 했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전성기가 영국 시절에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평가야 엇갈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절에 보인 그의 영화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평소 데이비드 린이 지니고 있는 고전주의적인 드라마와의 조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데이비드 린의 인물들이다. 로렌스 역을 맡았던 피터 오툴, 지바고 역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 <콰이강의 다리>에서 니콜슨 대령 역을 맡았던 알렉 기네스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인물인 동시에 그들이 지닌 감성을 캐릭터에 풍부하게 쏟아 넣은 연기자였다.


영국 런던의 크로이던 태생인 데이비드 린이 영화계에 편집기사로 활약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분홍신>, <피핑 톰>으로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마이클 포웰 감독의 초기작들을 편집하였고, 1942년에는 <우리가 복무하는 곳>(I'm Which We Serve)이라는 작품을 공동으로 연출한다. 그가 단독으로 연출한 작품은 국내에 <깁슨 가족 연대기>(This Happy Breed, 1944)로 알려져 있는 영화이다. <우리가 복무하는 곳>에 이어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를 겸한 노엘 코워드와 두 번째로 손을 잡고 만든 이 작품은 영국 중산층의 삶과 인간애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명성이 있는 이 작품은 깁슨의 아내를 통해 영국 가족사의 해체와 강한 여인상을 보여준다. 깁슨의 아내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 특유의 연대기적인 서술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과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를 요령 있게 풀어놓는다.

1945년에는 데이비드 린의 명성을 높인 <밀회>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후보로 선정된 최초의 영국영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만든 <위대한 유산>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3개 부문을 수상한다. <위대한 유산>은 훗날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데이비드 린의 고전적인 품격이 한발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찰스 디킨스와 시작된 인연은 1948년 작 <올리버 트위스트>로 이어지면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문학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음을 증명하게 되었고, 이러한 행보는 E.M 포스터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인도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닥터 지바고>의 포스터.
오마 샤리프(가운데)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세계적 스타가 됐다.

데이비드 린의 영국 시절 영화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이 시절의 영화들은 소시민적인 삶과 애환을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과 고전적인 품격을 유지한 영화들로 인정을 받는다. 1957년에 <콰이강의 다리>로 할리우드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의 수상 경력은 화려했다. <콰이강의 다리>는 감독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의 7개 부문을 석권하였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 역시 감독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당시 할리우드는 텔레비전 방송 산업에 맞서기 위해 대작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였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스펙터클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그가 영국 시절에 보여준 아기자기한 드라마의 솜씨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두 시절을 관통하는 인간의 강박관념은 영화의 규모가 크던 작던 동일하게 드리워진 데이비드 린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인 핍이 느끼는 성공에 대한 갈망과 집착은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인간의 자존심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파멸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 된다. <콰이강의 다리>의 알렉스 기네스의 모습이야말로 대표적이다. 니콜슨 대령의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시종일관 제 시간에 다리를 완성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일본군에게 수용되어 있는 영국군과 함께 있다. 일본군이 완성해야 하는 다리를 함께 짓자는 지휘관 사이토의 말에 니콜슨 대령은 제네바협정을 들먹이며 거부를 한다. 이로 인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함석으로 된 오두막에 니콜슨이 갇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곳은 마치 ‘오븐’처럼 열기로 가득하다(이 장면의 느낌은 앞에서 언급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 장면과 흡사하다). 이후 두 사람은 일종의 자존심 대결을 펼치며 다리 만들기를 실행한다.

그것은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말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전쟁 속에서도 굽힐 수 없는 인간의 자존심에 대해 인상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기묘한 존재이다. 적군을 도운 죄로 기소 당하지 않겠냐고 동료가 묻자 니콜슨 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이 다리를 오랫동안 사용할 사람들이 와서 이 다리를 어떻게 지었는지, 그리고 누가 지었는지를 가슴에 새기게 되기를 나는 바라네.” 니콜슨은 로렌스만큼이나 낭만적인 생각과 이상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열차가 통과하기 전날 밤, 그는 다리 밑에 “영국군 장병들이 설계하고 지었다.”는 명판을 망치질 한다.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니콜슨이나 로렌스는 쉽게 용인 받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에도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이함을 보여주는 데이비드 린의 세계가 아닐까. 그가 영국 시절에 이어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은 규모의 웅장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인간의 넓이와 깊이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의 세계는 이를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시를 완성해 간 여정이었다.

영화인 신철 - 한국영화계의 선봉

 


 

영화평론가 이정하는 “한국영화를 산업 차원에서 인식한 첫 번째 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충무로의 제작자들은 그를 혁명가 혹은 흥행사라고 불렀다. 1988년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차린 후 10여 년 동안 그는 항상 한국영화계의 ‘최초’였다. “왜 자본을 다른 곳(영화계 외부)에서 끌고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기존의 자본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왜 새로운 기획을 했냐고 한다면, 기존의 것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한 거고요. 계속 내몰려서 했던 것 같아요.”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과, 그것에 따른 뒷받침하는 창조적 추진력. 그의 행보는 현재도 한국영화의 화두다.

그의 부친은 만화가(지금은 고인이 된 신현성 선생)였다. 자연스레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영화도 그의 큰 관심사였다. 둘 사이에서 영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75). 대학교 1학년 때 연극반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문화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서영화연구회’의 일원이 되었고, 2학년 땐 이미 충무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때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고된 연출부 생활을 하던 그는 장길수 감독의 데뷔작 <밤의 열기 속으로>(85)에서 기획과 홍보 일을 맡는다. “의외로 재미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영화엔 시스템이라는 게 없었고, 감독이 기획부터 홍보까지 너무 많은 짐을 져야 했어요. 소재 선택에 있어서도, 관객과 만나는 지점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땐 극장에서 마케팅을 했는데, ‘왜 저렇게밖에 못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는 뭔가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극장에서 영화 마케팅을 하던 시절, 피카디리 극장과 명보극장의 선전실을 거치며 경력을 쌓은 그는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만든다. “자본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제작 노하우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죠. 그래서 영화의 핵심이 되는 컨셉트와 아이디어를 확실하게 제공하는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만든 거예요.” 한국영화 점유율이 10퍼센트대였고, 할리우드의 직배가 시작되었으며, 자본을 축적한 영화업자들은 빠져나가던 1980년대 말. 한국영화는 고사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영화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영화계에서 저의 첫 미션은, 한국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고. 관객들이 보길 원하는 영화를 찾아서 흥행을 거두면, 한국영화계가 망하지 않고 내가 일할 터전도 없어지지 않을 거니까요.”



신씨네를 만들고 신철 대표가 처음으로 기획을 맡은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9)였다. 그는 제일 먼저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을 만나 취재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한 편 개봉하려면 시나리오와 프린트를 모두 검열 받아야 했죠.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못하게 되니까 탁상공론이나 이상한 이야기로 빠지곤 했고요.” 한국영화가 현실적인 삶과 괴리되었던 시절, 신철 대표는 정치적 이슈를 피하면서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발로 뛰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삶엔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또 심각한 얘기가 많이 숨어 있었어요.”


지금은 너무나 보편적인 방식일지 몰라도, 당시엔 그런 기획 과정을 거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영화는 서울 개봉관에서 5만 명만 넘겨도 흥행작 소리를 듣던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16만8천 명을 동원한다. 새로운 방법론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90)로 여성 인권 문제에, <베를린 리포트>(91)로 분단 문제에 접근하며 ‘기획자’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신철 대표는, 어쩌면 <쉬리>(99)와 함께 1990년대에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일지도 모르는 <결혼 이야기>(92)로 충무로에 대변혁을 몰고 온다. 이 영화 또한 수많은 신혼부부 커플을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이 깃든 영화였다.

대기업 자본 유입, PPL 도입 등 산업적 측면 외에도 <결혼 이야기>는 한국영화에 ‘장르 트렌드’를 몰고 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만날 법했던 ‘로맨틱 코미디’는 한국적 상황으로 각색되어 서울 개봉관에서만 52만 명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봇물 터지듯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영화가 쏟아진다. 하지만 ‘트렌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저보고 트렌드를 잘 읽는다고들 그러시는데, 사실 트렌드라는 건 5,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 관객이 이런 영화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관객과 나를 분리시키는 순간, (관객의 요구에) 맞출 수가 없어요. 저는 제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 보고 싶은 영화를 기획할 때 흥행할 수 있었던 거고요.”



이후 그는 직접 제작에 뛰어든다. 제작자로서의 첫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미스터 맘마>(92). 서울에서 27만 명이었으니 큰 흥행이었고, 11만 명의 <101번째 프로포즈>(93)도 괜찮은 성적이었다. 세 편 연속 로맨틱 코미디로 성공을 거둔 신철 대표. 하지만 차기작은 <구미호>(94)였다. 장르적으로는 호러와 멜로의 결합이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을 도입한 작품이었다. “일상 생활을 소재로 선택해야 한다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바로 옆 극장의, 엄청난 특수효과를 사용한 할리우드 영화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선 소재 확장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선 특수효과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선택해야 했다. <스타워즈>(77)나 <블레이드 러너>(82)가 사용했던 아날로그 효과와, 당시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던 디지털 효과. 얼리 어댑터였던 그는 당시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래픽 효과를 경험했고 조만간 한국영화도 디지털 중심으로 바뀔 거라고 확신했다. ‘신씨네 컴퓨터그래픽스 아카데미’를 설립한 그는 고가의 장비를 들여와 작업에 착수했다.

본격적으로 CG를 도입한 <구미호>, 진일보한 CG를 선보인 <은행나무 침대>

“들여온 기계를 생전 처음 써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미호>를 만들었죠. 개봉 1주 전에 기술 시사회를 했는데…, 심장마비가 이렇게 오는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채 20분을 못 보고 몰래 도망치듯 극장을 나왔어요. 컴퓨터그래픽에 대해 그렇게 기대를 많이 하게 해놨는데, 엄청나게 욕 먹겠구나 싶었던 거죠.” 하지만 2년 후에 내놓은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96)는 확실히 달랐다. 18세 관람가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만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컴퓨터그래픽도 진일보했다.  “<구미호>의 실수를 거울 삼아서 솔루션을 많이 얻었어요. <구미호> 때 말단이었던 친구가 실장이 되어 전체적인 프로젝트를 관리했고요.” 영화라는 매체는 기술의 산물이라는 것, 기술적 진보에 따라 새로운 영화가 나온다는 것. 당시의 이 간단한 깨달음은 이후 ‘이소룡 프로젝트’인 <드래곤 워리어>와, 현재 추진중인 <로보트태권V> 실사영화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997년 한국 사회는 이른바 ‘IMF 체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편지>(97)는 그 해 겨울, 수많은 한국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최루성 멜로의 귀환’이었다. 서울 관객 82만 명. 이어지는 <약속>(98)도 서울에서 66만 명을 기록하며 대박을 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제작자는, 이번엔 극장을 눈물 바다로 만든 것.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하는 순간이었지만, 신철 대표는 여전히 “단지 진짜로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고 말한다. “영리하게 포인트를 맞춘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제 속을 들여다보는 걸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장르적, 기술적, 산업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던 신철 대표는 장정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00)을 통해, 말 그대로 ‘고생’을 한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건, 아직까진 한국 사회에서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일 거예요. 사회적 규범으로 어느 정도 걸러야 하는 기능도 필요할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술적 승화도 필요하니까요. 그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거죠.”

신철 대표에게 <거짓말>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 같은 작품이다. “한국영화의 심의 문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숙제예요. 그땐 정말 고생스러웠거든요. 툭하면 검찰에 불려가고, 필름 압수 당하고, 수색 영장 들어오고, 일간지 1면에 오르내리고. 고생은 정말 많았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한데, <거짓말> 같은 영화를 다시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모르겠어요.(웃음)” 결국은 법원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긴 했지만, 그땐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받았던 상황. 게다가 소스가 유출되어 불법 CD로 유출되면서 받은 현실적 타격도 컸다.



<구미호> 이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받았고, <거짓말>을 전후로 커다란 심적 고통을 얻었던 신철 대표에게 <엽기적인 그녀>(01)은 ‘봄날’ 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인터넷 소설을 절반 정도 읽은 상태에서 제작을 결정했어요.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그 좋은 원석을 곽재용 감독이 너무 잘 다듬었고요.” 당시로선 생소한 ‘인터넷 소설 영화화’였고, 주연을 맡은 차태현과 전지현도 그땐 ‘가능성’만을 지닌 배우였으며, 곽재용 감독은 사실 꽤 오랫동안 잊혀진 연출자였다. “저는 어떤 사람과 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기본적인 탤런트를 가졌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웬만하면 자세가 좋은 사람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저도 교만해질 때가 항상 문제였어요. 곽재용 감독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엽기적인 그녀> 할 때 그 탤런트와 자세가, 원작의 힘과 배우들의 젊은 파워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서울 관객 176만 명에 전국 관객 488만 명. 한국 사회에 ‘주5일 근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고 한국영화 최초로 ‘금요일 개봉’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러한 폭발적이며 스피디한 흥행력은 신철 대표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또 있었다.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엽기적인 그녀>가 한국에서나 재미있을 얘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홍콩에 이어 일본 시장에 진출한 <엽기적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중화권과 일본에서 모두 흥행한 유일한 한국영화인 셈. 하지만 아쉬움도 크다.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 불법 DVD가 적어도 1억 장, 많으면 3억 장이 팔렸대요. 동북아시아 지역에 퍼졌던 이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단 한 푼도 경제적 효과로 바꾸지 못했던 거죠. 참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리고 이런 얘기도 들었다. “작년에 어느 중국 대학생을 만났는데,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엽기적인 그녀> 때 왜 타임 캡슐을 만들어 팔지 않았냐는 거죠. 만약 그랬다면 아시아권에서 엄청나게 팔렸을 거라면서. 제작비 조달도 힘에 겨워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건데, 그런 부분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거죠. <엽기적인 그녀>를 브랜드로 좀 더 큰 시장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걸 다 날려버리고 만 거니까요.”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을 뒤로 하고 그는 태평양을 건너갔다. 이소룡을 디지털 캐릭터로 부활시키려는 <드래곤 워리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힘겹게 유족들로부터 3년 6개월의 초상권을 획득했고, 할리우드 기술 스태프들과 씨름하면서 보낸 3~4년의 시간.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신철 대표를 기다리는 건, 30년 만에 부활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표 캐릭터 로보트태권V였다.

사실 김청기 감독이 <로보트태권V>(76)을 다시 살려보자며 신철 대표를 찾아온 건 1999년이었다. 만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과거 'ARK'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는 꽤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로보트태권V>의 인터네가 필름. 신철 대표는 로보트태권V가 지닌 ‘캐릭터의 힘’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탄생한 지 30년인데 그 캐릭터나 콘텐츠는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요. 미키마우스가 80년이 넘었고, 일본에도 50년 넘은 캐릭터가 있지만 한국엔 없잖아요? 그리고 30년 정도 세월이 흐르면 어떤 ‘히스토리’가 생겨요.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그 무엇이 되는 거죠.” 게다가 태권도에 대해 리서치를 하면서, 그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엄청나게 큰 일을 해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권도를 우습게 생각했었는데, 조사하면서 이른바 ‘한류’의 근원이 태권도라는 걸 알게 됐어요. 189개국에서, 한국 인구보다 많은 7,000만 명의 사람들이 한국어로 태권도를 배우고 있으니까요. 엄청난 브랜드인데, 우린 그걸 잘 사용하지 못했던 거죠.” 그리고 ‘로봇’이라는 캐릭터는 미래 사업의 동력 중 하나였다. “로보트태권V는 히스토리와 태권도와 과학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한 몸에 녹여 가지고 있는 기묘한 캐릭터더라고요. ㈜로보트태권브이를 운영한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저희 팀의 능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캐릭터가 지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잘만 한다면 굉장히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2007년 1월 복원판을 재개봉시킨 신철 대표의 현재 프로젝트는 <로보트태권V>를 실사영화로 만드는 것. 4회짜리 웹툰 <브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웹툰을 장편 연재물로 확장시켰고, 그것은 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로보트태권V>를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지점을 생각하다가 <브이>라는 웹툰을 만났고 실사영화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때 <트랜스포머>(07)가 나왔죠. 사람들은 <트랜스포머>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 영화에 고마워요. 그런 영화가 흥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투자자들을 설득하기가 쉬워졌거든요.(웃음) <로보트태권V>는 <트랜스포머>보다 재미있을 거예요. 로보트태권V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등장할 것 같고요.”